아르헨티나 출신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생전에 늘 노벨문학상의 유력 수상 후보로 손꼽혔다.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속사포를 쏘는 듯 늘어놓는 현학적인 수사는 읽는 이의 기를 죽인다. 그는 장편 하나 없이 단편만으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존경받는다.
그의 단편 중 '뇌물'이라는 작품이 있다. 어두침침함과 부조리의 냄새가 풀풀 나는 제목과는 달리 줄거리는 상쾌하다. 능력 있는 교수인 A는 경력을 쌓고자 학술대회 대표로 꼭 참석하고 싶어한다. 최대 경쟁자는 B다. B는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학자인데다 학술대회 대표 추천에 가장 영향력이 큰 선임교수와도 매우 가깝다. 궁리 끝에 A는 선임교수에게 뇌물을 쓴다. 그것은 통렬한 논박(論駁)이었다. 익명이지만 자신임을 알 수 있도록 쓴 논문을 통해 선임교수의 교수법을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얼핏 사리에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뇌물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A는 대표로 뽑혔다. 그가 공격한 선임교수의 추천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선임교수는 처음부터 B를 추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A의 공격을 받고 난 뒤, B를 추천하면 A에게 보복했다는 평판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선임교수는 스스로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요즘, 또 하나의 게이트라고 부를 만한 부산저축은행 뇌물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금융계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를 가진 금융감독원의 전직 원장과 고위 간부, 감사원의 감사위원이 줄줄이 엮여 있다. 수사가 진행 중이고, 야당은 이들이 깃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몸통이 어디까지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보르헤스식 뇌물을 상상해 본다. 도덕적으로는 다소 비난받을 만한 수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도덕과 정직으로 무장한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는 최고의 뇌물이었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금융감독원이나 감사원의 고위 간부들에게 도덕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은행이야 옛날에 문을 닫았겠지만, 한 줌의 양심이 없어 수많은 서민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이 몸담은 조직과 스스로를 패가망신시키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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