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가운데 '솔라리스'(Solaris)라는 작품이 있다. 폴란드 작가 스타니슬라프 렘이 1961년 발표한 SF 소설을 72년에 영화로 만든 것이다. 2002년에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리메이크 했다. 99분 짜리인 소더버그 작은 보지 못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타르코프스키의 것은 감상에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165분의 길이도 부담이고 전개가 밋밋하고 느린데다 내용도 무겁다.
행성 솔라리스의 궤도에 있는 우주정거장의 대원들이 자살하거나 미친 증세를 보인다. 이를 밝히려고 우주정거장에 온 심리학자 케빈은 첫날, 아내를 만난다. 꿈과 현실이 엇갈리면서 아내와 함께한 시간이 재생된다. 아내에 대한 기억은 후회와 연민으로 케빈의 무의식 한구석에 저장된 것일 뿐 이제는 까마득히 잊은 것이다. 아내는 케빈의 이기적인 성격을 못 견뎌 이미 10년 전에 자살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은 기억이 있다. 다른 대원들도 이러한 기억이 현실로 나타나자 견디지 못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솔라리스의 바다에 방사선을 투사하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이 작품에서 다루고자 한 주제는 자기 정체성, 혹은 인간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반성이었다. 나일 수도, 혹은 아예 기억조차 사라져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아픈 과거와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대통령을 솔라리스의 바다 앞에 세워보자. 당선 전은 차치하고, 대통령으로서의 기억만 재생한다고 가정한다. 작고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폭격 사건 때 산화한 군인과 용산참사 때의 국민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약을 뒤집은 데 분노한 지역민이나 경제 정책, 교육 정책의 실패로 자살한 국민과 앳된 학생의 얼굴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청문회에서 줄줄이 낙마한 측근의 원망하는 얼굴도 있을 것이다. 불과 3년여 동안 일어나선 안 될 사건이 너무 많았으니,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다.
국민은 대통령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선거 때부터 BBK 주가 조작 사건에 휘말렸지만 그래도 경제를 살릴 후보인 듯했다. 그러나 뽑고 보니 재벌과 가진 자를 위한 대통령이었다. 지역민을 우습게 알아 신공항과 지방행정수도를 백지화했다. 입시제도는 개악(改惡)을 거듭했고, 북한은 다시 주적(主敵)이 됐다. 그 사이 공직사회는 뼛속까지 비리로 얼룩졌다. 이권이 있는 곳이면 동사무소 직원부터 청와대 수석까지 승냥이떼처럼 달려들었다. 정치, 경제, 사회, 국방 등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못 챙겼으니 국민은 지난 3년을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다.
이제 임기가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기득권층에서 유행했던 '5년만 참자'라는 말을 빗대 '2년만 참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대통령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예뻐서가 아니라 나라가 분열과 혼돈 속에 빠져 있고, 서민의 삶이 더 물러설 곳이 없을 정도로 힘들기 때문이다. 또 지난 대통령들을 외국 망명, 피살, 백담사, 비자금 몰수, 자식 구속, 자살 등으로 떠나보낸 부끄러움도 씻고 싶다. 우리 국민도 이제는 손뼉치며 보내는 대통령을 한 명쯤은 가질 때가 됐다.
박수를 받는 방법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을 수 있다. 개인 이명박이 아니라 대통령 이명박으로 남은 임기를 채우는 것이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느 중'고'대학을 나오고, 어디에서 직장생활을 했는지, 당적(黨籍)이 어딘지 잊어버리면 된다. 잡다하게 얽히고설킨 사생활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에서 켈빈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직면해 더없는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아내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고 화해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그리고 감독은 켈빈이 자신의 옛 고향집에 들러 평생 대립했던 아버지와 화해를 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대통령은 지금 당장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퇴임 뒤에는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누구도 그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鄭知和(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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