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은 봉화 영주 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구미를 거쳐 곧바로 칠곡으로 남류한다. 낙동강 물길이 칠곡 남쪽으로 왜관읍을 지나 왜관교, 제2왜관교를 거치면서 흘러내리는 서쪽에 노석리, 동쪽에 금산리와 낙산리가 있다. 강 동쪽 금산리와 낙산리, 지천면 금호리에 걸쳐 '검은 산'에서 유래한 금무산(金舞山)이 우뚝 솟아 있다. 금무산과 바로 앞 낙동강에서 따온 이름이 바로 낙산동이자, 낙산리이다.
칠곡군 왜관읍 낙산1리 가실(佳室). 가실마을은 동북쪽으로 금무산이 솟아 있고, 그 산줄기들이 동.남.북 3면으로 둘러싸고 서쪽에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왜관읍에서 남쪽으로 6㎞가량 떨어진 곳이다. 낙산천이 금산리와 낙산리를 가로지르면서 가실마을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금무산 줄기 무지미(무덤)산이 동쪽에서, 자라산(남산)이 남동쪽에서 마을을 에두르고 있다.
◆갈대가 많은 아름다운 동네, 가실
낙산1리는 원래 가실과 배태 등 크게 두 마을이 있었다. 가실은 옛날 낙동강 변에 큰 습지가 발달돼 갈대가 많았기 때문에 노곡(蘆谷;갈대 골짜기), 노호(蘆湖;갈대 호수)로 불렸다고 한다. 가실은 갈대가 많아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가실 바로 곁 배태는 낙동강 변에 위치해 깊은 소(沼)와 나루터가 있어 '배터'로 불리다 배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낙동강이 산 절벽을 휘돌아가는 형세여서 배를 대기가 좋았고, 특히 큰 소에 있는 바위가 배를 매다 걸기가 적당해 '배를 대던 터'라는 의미였다는 것. 한편으로 마을에 배나무가 많아 배터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배태마을은 1990년부터 왜관1차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모두 이주해 현재는 지명만 남아 있다.
전석동(69) 씨는 "낙산초등학교 뒤부터 배태마을이었어. 한 10여 가구가 살았는데 (왜관)공단 들어오고 이주단지 생기면서 없어졌지"라고 말했다.
이종환(76) 씨는 "배태는 옛날 이름이 이현동이라, 배를 많이 볼 수 있는 동네라고 그렇게 불렀어"라고 했다.
가실마을은 마을 중앙의 새창을 비롯해 기르골, 쇠라골 등 자연마을이 있다. 현재 64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가실은 약 450여 년 전 한강(寒岡) 정구(1543~1620) 선생이 거처를 위해 선택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청주 정씨인 한강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뒤 선조 때 관직에 나가 창녕현감 통천군수 강원도관찰사 충주목사 공조참판을 거쳐 광해군 때 대사헌까지 지냈다. 가실은 이후 200여 년 전 광주 이씨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한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경상도 북서부지역 소통의 산실, 가실성당
낙동강을 바라보며 우뚝 서 100여 년의 역사를 품은 가실성당은 가실마을은 물론 경상도 일대를 묶어주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다. 가실성당은 근현대까지 학당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치며 마을의 화합과 소통을 이끌었다. 가실본당 신부들은 말이나 배를 타고 수십, 수백리 길을 달리며 성주 선산 문경 상주 군위 안동 예천 의성은 물론 충청도 황간과 전라도 무주까지 아우르는 선교활동을 했다.
기와집 가실성당이 세워진 것은 116년 전인 1895년 9월이다. 가실성당은 당초 17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당시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가 살던 집터였다. 평생 글공부에 전념하던 성섭은 만년에 천주교를 받아들여 집안에 복음을 전파하다 1788년 가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성섭의 후손인 성순교는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다 한국 천주교의 마지막 박해인 1860년 경신박해 때 가실 집을 외가에 맡기고 상주로 피난 갔다 이듬해 상주에서 순교했다.
당시 경상도 선교책임자로 부임한 김보록 신부는 칠곡 지천면 신나무골에 대구본당을 설립한 뒤 경북 북부지역 선교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성순교의 5칸 기와집을 사들인 것이다. 이 자리는 조선시대 가실나루터와 강창나루터가 있어 해상교통이 활발했던 터라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쉽게 대구 안동 부산 방면으로 오갈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던 것. 1895년 초대 가실본당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가밀로 파이아스(한국명 하경조) 신부였다. 당시 가실본당 관할에는 31개의 공소가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
현 가실성당 건물은 그로부터 27년 후인 1922~1923년 신고딕풍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대구 계산성당과 칠곡 왜관성당 등 한국 천주교회 건물을 많이 설계한 프랑스인 박도행 신부가 설계자였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도 인민군 병원으로 쓰여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2000년 부임한 독일인 바로 톨로메오(한국명 현익현'71) 신부는 "로마네스크식 성당을 짓고 옛날 성당은 강당으로 썼는데, 6'25때 파괴되었다"며 "하지만 성당은 하나도 안 상했는데, 이유는 먼저 인민군, 그 다음엔 UN군 병원이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전석동(79) 씨는 "선대가 경기도에 살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여(기)까지 피난왔는데, 6대째 살고 있다"며 "아이들은 성당을 놀이터마냥 찾아와 어울렸어. 가실에는 신부 2명, 수녀 7명이 나왔다"고 말했다.
마을 아이들은 일요일이 되면 자연스레 성당을 찾았고, 주민들은 근대까지 성당의 학당에서 신'구학문을 배우며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옛날 성당의 종소리는 마을의 시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당에는 또 200여 년된 감나무가 성당보다 더 오랜 세월 가실의 역사를 지켜보며 자라고 있다.
◆무지미산에서 쏟아진 왜관의 역사
낙산초교 동쪽 가실마을을 에워싼 무지미산(무덤산). 무지미산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완만한 능선 일대는 왜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유적지이다. 90년대 왜관 1차산업단지 조성공사를 벌이기 앞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발굴조사를 하면서 드러난 유적이다. 당시 발굴을 통해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상당한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주민들은 이 산을 옛날 무덤이 많이 발견됐다고 무덤산 또는 사투리로 무지미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발굴 당시 이 능선에서는 수많은 무덤을 비롯해 원통모양 그릇받침, 굽다리 접시, 목 짧은 항아리 등 토기와 자기, 석기조각, 기와 조각, 석재 조각 등 숱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특히 고려시대 유물이 집중 출토됐다. 또 무덤산이 뻗어내린 기슭 가실터널 공사에서도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칠곡군은 무덤산 기슭에 출토된 유물 전시관 등으로 소공원을 꾸며놓았다.
박상목(57) 씨는 "고려시대 때 옛날 고려장이라고 있지요. 그거 했던 자리라요. 조사를 하니까 옹기라든가 많이 출토됐지요. 산 아래 고려장 출토됐는 거 모형 만들어 유리 안에 넣어 전시해 놓았지요"라고 말했다.
이종환 씨는 "옛날에 여기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가뵈. 도로 만들면서 2년간 발굴한다고 하다 끝이 없이 나오니 다시 묻어놨잖아. 옛날 토기, 전부 제기(제사그릇)였는기라. 고려장터라"고 말했다.
무덤산 기슭 유적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도 유물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민들은 금무산 줄기의 하나인 무덤산 기슭 일대가 황토여서 옛 무덤으로 적지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들 유적지에서는 고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돼 추가 발굴조사 등을 거친다면 왜관지역 세력의 변화추이 등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바로잡습니다]=지난 6월 22일자 18면 '신낙동강시대-예천 백송마을' 입향조 관련 내용 중 이하의 맏아들이 대를 잇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하의 맏아들 이완이 종손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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