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행복 칼럼] 친구야 친구야

친구야 친구야

몇 년 전 대구서부노인병원장에 취임하던 날 친구들이 축하 화분을 보내주었다. 꽃을 꺾어 만든 꽃바구니나 꽃꽂이는 싫어한다. 이런 취향을 아는 친구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땐 가급적 살아있는 꽃을 보내준다. 받은 화분들을 병원 부서 여기저기에 나줘주고 나면 기분이 매우 좋다. 그러나 병원 내부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직원들도 바쁜 탓에 대부분 화분들은 웃자라 볼품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죽게 된다. 화분 선물을 받아도 이런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노인병원에 근무하고 나서 몇 달 뒤였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 낡은 승합차 한 대가 병원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내 친구 둘이 차에서 내려 한참 무언가 끄집어 내리고 있었다. 배롱나무 두 그루였다. 살아있는 꽃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한 친구가 배롱나무를 구해두었다가 비 오는 날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배롱나무는 비 오는 날 심어야 확실하게 살 수 있다며. 그들은 막걸리와 삽, 곡괭이까지 다 싣고 왔다. 빗속에 배롱나무를 심고 막걸리까지 부었다. 남은 술은 물론 병원 직원들과 친구들이 음복 주로 나눠 마셨다. 두 그루의 배롱나무는 지금까지도 잘 자라고 있다.

배롱나무를 심은 뒤 친구들과 시내에서 점심을 먹다가 노인병원 이야기가 나왔다. 병원의 침상 수가 250개인데 어제 드디어 100개 침상이 환자로 채워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병원 경영이 무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뭔가 100이란 숫자를 격파한 것을 기뻐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노인병원이 이제 기초가 잡히고 드디어 도약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축하해 준 것이다.

그런 박수 끝에 느닷없이 한 친구의 제의로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주었다. 지금도 대구서부노인병원 중앙 홀에 가면 커다란 기둥시계를 볼 수 있다. 그 시계의 유리면에 보면 한 자로 '백파 기념'이라고 쓰여 있고 성금을 내어 준 친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살면서 친구들에게 많은 것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때로는 돈이기도 하고 때로는 물건이기도 하였다. 선물의 크기는 자그마했다. 부담이 될까 봐 또는 자존심 강한 내가 거지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게 작은 선물을 하였다.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 선물은 친구들의 우정이므로 물리칠 수가 없었고 또 그것은 잘하라고 가하는 무언의 충고였기에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물은 작아도 무척이나 큰 채찍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공공병원에서 별 탈 없이 근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친구들의 이런 무서운 우정 때문이었다.

권영재 미주병원 진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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