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대관령 휴양림에서

오케스트라처럼 아름다운 계곡의 물소리에 취하다

계곡의 물소리가 듣고 싶었다. 큰비가 오고 난 뒤 '콸콸콸' 하며 쏟아지는 그런 계류성(溪流聲) 속에 갇히고 싶었다. 볼륨을 높인 음악도, 숲속의 새소리는 물론 벌레들의 사랑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계곡의 소리 향연에 초대받은 귀빈이 되고 싶었다.

옛날 다산 선생은 소나기 올 때 벗들을 불러 모아 술과 안주를 싣고 세검정에 있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보라를 구경하러 나선 적이 있다. 그 폭포수는 비가 그치면 금세 잦아들기 때문에 빗속을 뚫고 말을 달려가지 않으면 소나기 올 때의 빼어난 경치와 천둥 치는 듯한 굉음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구는 세검정처럼 소나기 올 때 폭포 구경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물소리가 그리우면 지리산, 가야산, 소백산이 제격이지만 장마 끝에 팀을 구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차선책이 비가 개는 즉시 시집 한 권을 들고 팔공산 폭포골이나 수태골의 물소리 명당을 찾는 길밖에 없다.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럴 땐 생각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마음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향해 심속(心速)으로 달려가자고 명해야 한다. 가고 싶은 계곡의 물소리를 찾아 들메끈을 조여 맬 필요도 없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달려가면 된다.

어느 해 여름 지리산 칠선계곡 입구 추성동의 개울가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저녁 때까지 말갛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석이(石耳)볶음을 안주로 술 한잔 거나하게 마신 후 잠자리에 들었지만 계곡 물속에서 바위 덩어리들이 굴러가는 소리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설쳐야 했다.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우렁우렁' 계곡이 우는 소리 속에 보낸 하룻밤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

팔공산의 비 오는 풍경과 계곡의 물소리도 일품이다. 지금은 철거됐지만 동화사 입구 계곡 왼쪽에 있던 달빛여관에서 들리는 물소리도 가히 반할 만하다. 골짝 골짝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계류수가 이곳에 도달하면 '팔공 필하모닉'이라 불러도 좋을 오케스트라로 바뀐다.

계곡의 맨 갓방에 누워 잠을 청하면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빗속에서 환청처럼 들린다. 그 빗방울이 굵어지면 제3세대의 뮤지션 '야니'(Yanni)의 '더 레인 머스트 폴'(The rain must fall)에 나오는 흑인 여성 연주자의 바이올린이 뿜어내는 강렬한 빗소리로 바뀌면서 절정을 이룬다.

해마다 계곡 물소리 듣기는 여름 숙제였다. 올해는 강릉의 대관령 휴양림에서 일찌감치 끝을 냈다. 전국 수필의 날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이다. 어스름께 휴양림에 들어서자마자 계곡에서 들려오는 전주곡이 예사롭지 않았다. 숲속의 다람쥐 방을 숙소로 배정받았다. 그게 마침 계곡 바로 옆이어서 옆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듣는 계곡의 물소리는 명창의 판소리 한마당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고 소나무 가지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는 음력 유월 보름달은 그 감동 위에 살짝 얹어 놓은 고명처럼 맛과 멋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은 잠도 계곡이 연주하는 자장가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좀 자지러지는가 싶으면 하나님의 물뿌리개가 소낙비를 뿌려주어 꿈속에서도 주렴처럼 내리는 폭우 속을 헤매야 했다.

비가 그친 아침이다. 정신이 말짱하고 개운하다. 숲속 바위 위에 지은 집에서 자면서 밤새도록 물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영혼에 끼어있던 묵은 때가 내시경 검사 전의 대장 청소하듯 말끔하게 씻겨 나갔나 보다. 휴양림에서 닦아놓은 산책길을 둘러보러 길을 나선다. 길옆에는 산수국 군락이 함초롬히 젖어 아침 햇살을 받은 이슬방울들은 보석처럼 영롱하다.

백여 년 된 금강송 사이로 '휘이'하며 솔바람이 불어온다. 왕거미 한 마리가 과녁 같은 거미줄을 쳐놓고 엎드려 염불을 외고 있다. 코끝에 와 닿는 공기가 싸하다. 소나무 숲 사이사이엔 산안개가 피어올라 이곳을 선경이게 한다. 무릇 운무(雲霧) 속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입산한다는데. 어쩌나, 계곡의 물소리 좋아하고 연하벽(煙霞癖)이 심한 나 같은 사람을 늦깎이 동승(童僧)으로 받아줄 암자는 어디 없을까.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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