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유령이 지구촌 하늘을 뒤덮고 있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소진된 체력이 회복되기도 전에 덮친 이 위기로 세계경제는 또다시 수렁에 빠지고 있다. 금융위기는 근면한 나라와 게을러빠진 나라를 가리지 않는다. 14년 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뼈에 사무치게 경험한 바다. 이는 매우 불공정하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아시아 국가에 대해 "경제 기반이 탄탄하고 지속 성장이 예상된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나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자 평가는 180도 바뀌었다. 아시아 국가에 만연한 비리와 정경 유착으로 과도한 대출과 비효율적 투자가 이뤄졌고 이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는 사리에 닿지 않는 억지다. 아시아 국가에 그런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과연 그토록 눈부신 경제성장이 가능했을까? 또 비리나 정경 유착과는 거리가 먼 스웨덴이 이보다 앞선 1992년에 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한 유형의 금융위기를 겪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 같은 이는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가 1998년 이후 신속하게 경제 안정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그 같은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번에도 그렇다. 우리는 2008년 글로벌 위기에서 가장 먼저 탈출했다. 그렇지만 빚으로 흥청망청 댄 미국 때문에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늘어나는 재정 적자나 가계 부채 등 우리 내부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이번 위기를 촉발한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우리와 무관한 다른 나라의 잘못 때문에 받지 않아야 할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가. 바로 지나친 '세계화'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 증시의 외국인 비중은 아시아 주요 증시 가운데 대만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대외 변수에 그만큼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됐나. 신자유주의가 신주처럼 떠받들고 있는 전면적 금융 개방 때문이다. IMF에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이 질서에 편입됐다. 외환위기가 전면적 금융 개방에 저항하는 한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월가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음모였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다.
어쨌든 세계적인 금융 개방 체제가 구축된 이후 금융위기가 습관성 질병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금융 개방이 위기의 주범임을 보여준다. 카르멘 라인하르트와 케네스 로고프라는 경제학자는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이들은 1800년 이후 발생한 모든 금융위기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 후 이를 자본 이동 시기와 비교한 결과 금융위기가 터진 시기와 자본의 이동성이 높아진 때가 거의 대부분 들어맞았다.
금융위기는 한 나라 경제 전체를 쑥밭으로 만든다. 우리가 경험했듯 환율이 치솟고 기업은 신용 경색에 내몰린다. 내부 수요는 위축되고 성장은 뒷걸음친다. 기예르모 칼보라는 경제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과정을 거쳐 위기가 수습될 쯤이면 GDP는 평균 20% 하락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자본 자유화가 나쁜 것은 무엇보다 개별 국가가 자신의 사정에 맞는 정책을 펼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금리만 예를 들어보자. 물가 억제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외자가 급격히 유입된다. 시중 자금이 늘어나 목표로 했던 물가 억제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시중 자금난 해소를 위해 금리를 인하하면 외자는 급격히 빠져나가 환율이 요동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줄 수밖에 없다. "단일 경제와 단일 정부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거대한 이동에 적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업률, 총생산, 인플레이션 관리 같은 경제정책 목표를 희생시키고 크나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국제 자본 거래 통제를 위해 자본 거래에 세금(토빈세. Tobin tax)을 부과하자고 제안했던 제임스 토빈의 말이다.
그렇다고 자본 이동 자유화가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자유화의 전도사였던 전 IMF 부총재 스탠리 피셔는 자본시장 개방이 많은 이익을 낳을 것이라고 했지만 실증분석 결과 이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인정했었다. 자본 자유화는 월가의 협잡꾼들에게는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줬을지 몰라도 개별 국가에게는 고통과 혼란만 안겼다. 이제 지구촌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국경 없는 자본의 이동을 그대로 둘 건가 말 건가를.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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