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렀나/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남아가 제 일신을 아끼랴/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다/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거국음(去國吟)이다. 1911년 새해 벽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떠나면서 가없는 회한과 비장한 각오를 이렇게 읊었다. 나라가 망하고 첫 새해를 맞아 결행한 만주 망명길이었다.
석주는 설을 쇤 음력 초나흗날 선산이 있는 도곡에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정겨운 고향 사람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다음날 새벽에는 사당에 나가 조상들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제사와 친척들의 생활을 위한 논밭 일부만 남기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모두 처분해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자금을 마련한 석주는 노비문서도 불태웠다. 거느리던 노비들이 양민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아있을 동생들과 가족 친지들을 불러 자신의 망명 계획을 밝히고 후일을 당부했다.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는 친족과 동문 제자들을 뒤로한 채 기약없는 망명길에 오르니 만감이 교차했다.
석주 이상룡! 그가 누구이던가. 안동 전통 유림의 한 가문을 이룬 고성 이씨의 종손이었다. 한평생 책이나 보며 편안히 살 수 있는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쓰러져 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다.
빼앗긴 나라만 되찾을 수 있다면 재산이 아깝지 않았다.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그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풍과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1858년 11월 안동 법흥동에 있던 99칸 대저택인 임청각(臨淸閣)에서 태어난 석주는 퇴계 학맥을 계승한 대학자 서산 김흥락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서산은 부친의 외삼촌이었다.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청년 이상룡의 마음도 심산하기 그지없었다. 조국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전통과 예절을 지키며 500년 사직을 간직한 나라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등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에다 국모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까지 발표되자 나라 안이 발칵 뒤집히고 유림들의 분노는 의병으로 표출되었다.
안동에서도 의진이 편성되고 석주의 외삼촌인 권세연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석주는 이때 조부상을 당해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으나 고성 이씨 문중을 대표해 500냥의 의연금을 기부했다.
그러나 의병항쟁만으로는 이미 기울어진 국권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1908년 초 1만 냥의 자금을 마련해 구축하던 가야산 의병진지마저 일본군의 기습으로 무너지자 석주는 의병의 한계를 절감했다.
새로운 방도를 찾는 석주에게 다가온 것이 서양 근대사상이었다. 그는 신서적과 서울에서 발행된 잡지와 신문을 탐독하며 국제정세와 일본의 실체를 익혔다. 안동에 신식교육기관인 협동학교가 들어서자 이를 도왔으며,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했다.
석주는 각 사회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라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할 백성이 우선 그 능력을 갖춰야 하고, 그런 백성들의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서양 근대사상과 제도를 수용하면서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그마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망하자 유림의 자정순국이 이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을 삼키며 두문불출하던 석주는 국사(國史)를 저술하는 한편 만주지도를 펴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고구려의 옛 영토인 만주라면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발판으로 삼기에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만주 벌판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무장한 독립군을 양성해서 침략자 일제를 몰아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른바 석주의 독립전쟁론이다. 서울에서도 양기탁 안창호 김구 이승훈 신채호 이회영 이시영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이 같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었다.
석주는 지체 없이 가산(家産) 정리에 들어갔다. 고성 이씨 가문은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였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의병양성과 항쟁에도 수만 냥의 자금을 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박민영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석주는 망명 이후에도 서간도에서의 대규모 토지 구입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체코제 무기 구입 등을 위해 아들 준형을 국내에 잠입시켜 그나마 남아있던 고향의 가옥과 토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더 매각했다"고 밝힌다.
석주의 망명일지인 서사록(西徙錄)에는 자진과 망명의 갈림길에서 고뇌한 그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다. 석주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가야산 기병과 대한협회 안동지회가 실패하고 나라가 망한 지금 다만 결행하지 못한 것이 죽음'이라고 토로한다.
그러나 죽음 대신 망명의 길을 택했다. 백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을 뜻으로 단군성조의 영토, 고구려의 강역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펴겠다는 단안을 내린 것이다. 버릴 수 없는 독립에 대한 희망, 이것이 석주가 만주로 간 까닭이다.
안동~추풍령~서울~신의주~단동~환인현 횡도천~유하현 삼원포에 이르는 2천500리의 망명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석주는 가솔들을 이끌고 살을 에는 북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를 조국 산천을 뒤로한 채 국경을 넘으며 석주는 나라 잃은 설움과 광복의 의지를 시(詩)로 읊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만하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이미 내 집과 토지 다 빼앗고/ 내 처자도 넘보는데/ 이 머리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
이때 석주의 나이 53세. 상당한 재력을 지닌 명문가의 후손으로 인생의 후반부를 맞아 주변을 정리하고 편안한 여생을 즐기고 싶은 나이였다. 그러나 석주는 형극의 길을 자청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도 섞인 일행이 압록강변을 따라 서간도로 가는 여정은 참으로 혹독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며 황량한 만주벌판에 몰아치는 거센 눈보라와 싸우면서 수레 위에서 이불을 덮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회인현 항도촌(환인현 횡도천)에 도착하니 앞서 와 있던 처남 백하 김대락이 반겨 맞았다. 당분간 그곳에 머물며 한인사회 건설 문제를 논의한 석주와 안동인들은 당초의 목적지였던 유하현 삼원포로 향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예고하듯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험난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한 석주는 먼저 도착한 이동녕 이시영 등 신민회 인사들과 한인사회 건설과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주력했다. 그것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의 조직과 신흥강습소라는 민족학교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1919년 3월 거족적인 독립만세의 울림이 만주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지자 석주는 서간도 독립군의 영수가 되어 항일전쟁을 이끌었다. 각 독립운동 단체를 한족회(韓族會)로 통합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해 총수가 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전쟁을 담당할 독립군과 간부 양성에 돌입하게 된다. 1920년 5월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개시한 서로군정서는 일제의 대병력이 만주로 쳐들어오자 북간도 독립군과 연합해 청산리대첩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독립운동사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석주의 진면목은 복잡다기한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과 통일을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이다.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에서 박용만 등과 함께 군사기구의 통합을 촉구했으며, 1922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아우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했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62명의 독립운동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도 김동삼 등을 보내 여러 노선의 통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4년 11월에는 남만주의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1925년 9월 석주는 어려움에 처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취임했지만, 산적한 난관들을 극복하는 데 한계를 느끼면서 만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삶은 계속되었다.
1932년 5월 12일 길림성 서란현 소성자에서 석주는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채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석주의 유해는 일제가 패망하고도 45년이 지난 1990년 10월에야 그렇게도 소원이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채영국 국민대 교수(한국학연구소)는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이상룡의 독립정신'이란 저서에서 "이상룡이 없었다면 서간도가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는 우리 민족사의 암울한 시기에 서간도의 대지를 한민족을 위한 희망의 땅으로 일군 거인(巨人)"이라고 평가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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