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화점 명품 못잖은 자신만의 구두, 말씀만 하세요" 향촌동 수제화골목

사진=과거 문인들과 젊은이들의 거리였던 향촌동 수제화골목. 기성화의 범람과 젊은 기능공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70여 개의 업체가 성업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진=과거 문인들과 젊은이들의 거리였던 향촌동 수제화골목. 기성화의 범람과 젊은 기능공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70여 개의 업체가 성업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문인들의 단골가게, 대학문화의 거리, 막걸리 골목. 예전 이 골목의 이름이었다. 지금 이곳은 '수제화골목'으로 불린다. 300여m 남짓한 골목 양쪽으로 수제화 공장, 판매점, 재료상 등 70여 개의 관련 점포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경상감영공원을 끼고 대구역 방향으로 가다보면 양옆으로 '제화', '피혁' 같은 간판이 모여있는 골목을 만날 수 있다. 골목에 들어서면 코끝에 가죽냄새가 맴돈다. 손으로 가죽을 만지고 있는 수제화 장인들이 앉아 있고, 가게 안에는 광까지 내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수제화들이 한가득 진열돼 있는 곳이 향촌동 수제화골목이다.

◆유명 유흥가가 수제화골목으로

향촌동 일대는 유명한 다방, 술집 등이 많았다. 단순히 유흥가가 아니라 문인과 예술인들이 즐겨 찾는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였다. 항상 유동인구가 많았고 특히 젊은 남녀들이 많이 찾는 지금의 동성로 같은 공간이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이 골목 저 골목 사람이 빼곡해 인파에 밀려 움직여야 할 정도로 번화가였다.

그런 번화가에 1970년대부터 수제화 전문점이 하나 둘 들어섰고 본격적으로 수제화골목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1983년 유명한 디스코텍이었던 '초원의 집'에 큰 불이 난 뒤 골목은 점점 유흥가의 모습을 잃기 시작했고, 때마침 교동에 몰려 있던 수제화 가게들이 귀금속점에 자리를 내주고 옮길 곳을 찾고 있었다.

교동에서부터 수제화를 만들었다는 한 상인은 "원래 1960, 70년대에는 지금 귀금속골목이 신발 골목이었다"며 "불이 나고 골목 가게 세가 많이 싸지면서 이쪽으로 옮겨왔다"고 말했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수제화를 저렴하게

향촌동으로 공장과 판매점이 옮겨오면서 수제화골목도 전성기를 맞았다. 120여 개의 가게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골목에서 큰돈을 버는 사람들도 많았고, 수제화 기능공들도 일주일만 일하면 공무원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한 상인은 "1970년대에는 비싸서 먹지 못했던 짜장면, 라면을 골목에만 오면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수제화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전국 곳곳에서 수제화를 사가기 위해 골목을 찾았다. 한 상인은 "경북지역에서 기차를 타고 온 양화점 상인들이 수제화를 주문해놓고 근처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어슬렁 놀다 와 저녁쯤 물건을 찾아가곤 했다. 지금은 지방에 양화점들이 많이 없어져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며 예전을 떠올렸다.

지금도 골목에서 만들어지는 수제화들은 전국으로 나간다. 백화점에서 20만, 30만원대에 구입하는 수제화들도 알고 보면 골목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이 많다. 백화점 입점 브랜드들이 향촌동 수제화 공장에 아웃소싱을 통해 수제화를 받아 판매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백화점과 똑같은 물건을 골목에서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수제화골목에서는 10만원이면 구두 한 켤레는 살 수 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골목을 찾는다. 어떤 손님들은 백화점에서 디자인을 골라 찾아와 자신만의 구두를 사가기도 한다.

◆밀라노 같은 수제화의 도시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값싼 중국산 기성화가 몰려오고 대형마트나 인터넷을 통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수제화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10년 전부터는 수제화를 배우겠다는 사람도 끊겼다. 일하는 시간에 비해 예전만큼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견습공 기간에는 기술을 습득하는 만큼 월급을 적게 줘 요즘 젊은이들이 배우기를 꺼린다. 지금은 40, 50대가 마지막 세대가 된 상황이다.

골목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가운데 이탈리아 밀라노의 형태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단순히 구두를 만드는 제조공장이 아니라 가죽제품 전반을 다루면서 공방을 만들고 옛 문화공간을 살려 관광까지 가능한 형태로 만들자는 것. 경북대 이철우 교수는 "향촌동 수제화골목은 도심에 제조업이 자리하고 있는 도시지리학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라며 "이곳을 밀라노처럼 만들면 도심개발에 새로운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은 없지만 골목 상인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대구수제화협의회 우종필 총무는 "수제화를 만드는 기술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켜 나가야 할 부분"이라며 "수제화를 찾아주는 소비자들이 많다면 다시 예전 같은 전성기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봄이기자 bom@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