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역사의 판단

국회 출입 기자 시절 신년 인사차 연희동으로 갔을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엔 험하고 궂은 일이 많았다. 누군가가 치워야 할 일이었고 선배들의 몫이었다. 험하고 더러운 일을 했지만 그렇다고 청소부 역할을 한 선배들이 다 나쁘고 더러운 것은 아니었다." 비자금 사건 이후 옥고를 치르고 국민의 불신을 받는 전직 대통령의 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모든 것은 내가 안고 간다"던 그가 신년 인사를 간 고향 후배들에게 보인 속내의 한 부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적 인기도가 낮다. 공과를 평할 때 공로를 말하는 이는 적다. 노 전 대통령은 올해 80세다. 지병으로 자리보전을 한다. 재직 시절 국무위원을 비롯해 그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국내외 인사 175명이 최근 각자의 추억을 담은 글을 모아 '노태우 대통령을 말하다'란 책을 냈다.

이 책에서 이들이 제일 높게 꼽은 치적은 북방외교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지만 당시 우리의 국제적 위상은 애매했다. 중국과 소련은 한국과 외교 관계가 없었고 동유럽 국가 중 서울에 대사관을 둔 나라도 한 곳에 불과했다. 남북한 모두 유엔 비회원국이었다. 그러나 임기 말 러시아와 중국, 동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서울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북한과의 화해 무드 조성으로 남북 교류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것도 그의 임기 내 주요 과제였다. 이들은 그런 노력의 결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 및 활동 영역이 커졌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구현에 대한 실천 의지도 높이 샀다. 자기중심적 민주주의를 외치던 분들과 달리 권리를 양보하며 민주주의 실천에 앞장섰다고 했다. 6'29선언의 배경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노 전 대통령이 밝힌 6'29선언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서울의 봄'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정치자금 문제는 아직도 그를 옥죈다. "민주정치 실천에 대한 위기 극복에 지출이 많아진 것일 수도 있다"는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다른 분들의 정치자금 문제도 객관적으로 밝혀진다면 그의 위치는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고 변호했다.

역사적 판단은 시대가 지나야 객관적일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그의 말처럼 청소부였는지 모른다. 흥분이 가라앉고 난 뒤 노 전 대통령이 차지할 자리는 어디일까 궁금하다. 노 전 대통령의 쾌유를 빈다.

서영관 논설주간 seo123@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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