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은 1990년 11월 3일 삼성 라이온즈의 제6대 사령탑에 올랐다. 삼성은 "정동진 감독이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서 5연승을 거두고 2위에 오른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팀 입장에선 결정적일 때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감독이 더욱 절실했다"며 감독 교체의 이유를 밝혔다.
일본에서 야구를 한 김성근 감독은 투수 출신으로 철저한 관리야구 신봉자였다. 그는 선수관리는 물론 시즌 운영까지도 모두 계산에 넣고 꾸려가는 스타일이었다. 삼성은 그의 치밀한 야구가 마지막 단추를 끼우지 못하는 라이온즈를 최종 목적지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
삼성은 그동안 미국식 야구를 지향했다. 프로구단 최초로 미국전지훈련을 떠났고, 미국인 코치를 영입했다. 국내 코치진의 미국연수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김 감독의 등장으로 변화는 불가피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당면과제 앞에 장기적 안목으로 구단을 운영하는 미국식 야구는 설 자리가 없었다. 김 감독은 곧바로 일본 지도자들을 인스트럭터 형식으로 초청, 색깔 바꾸기에 나섰다. 4월 초부터 타격 인스트럭터로 데라오카, 투수 인스트럭터로 오가와를 초청, 3개월씩 선수들을 지도하게 했다. 트레이너에는 이케다가 3개월간 초청됐다.
김 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선수들을 철저히 관리하겠다. 지금까지의 개인기를 지양하고 팀플레이에 주력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이는 종전까지의 자율야구를 관리야구로 전환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이제 또다시 주저앉지 않는다.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달린다." 김성근 감독의 말은 구단 고위층을 미소 짓게 했다. 약팀만 맴돌다 10년 만에 강팀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김 감독에겐 1991년은 우승의 꿈을 이룰 절호의 기회였다.
김 감독은 삼성이 기량이 뛰어난 주전급 선수들로 팀을 운영, 한두 명의 부상이 곧 팀 전력 공백으로 이어져 왔다고 보고 예방 대책으로 포지션별 경쟁 체제를 도입했다. 김 감독은 지난 시즌 에이스 김상엽을 마무리로 돌렸고 류명선'이태일'김성길'성준과 LG에서 데려온 최일언을 포함해 선발라인업을 구축했다. OB에서 신경식을 영입, 김용철과 1루수 경쟁을 시켰다.
김 감독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모든 일상을 야구에 초점을 맞추며 스스로 근성을 보였다. 직접 방망이를 들고 공을 쳤고, 투수들의 피칭을 끝까지 지켜봤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라.' 김 감독은 오전 4시 김상엽을 불러내 투구연습을 시켰고, 그의 지시에 투수 박용준은 매일 500개의 공을 던져야 했다.
이선희 당시 코치(현 삼성 스카우트 코치)는 "경산서 시즌을 준비할 때였다. 연습이 끝나고 식사시간이 됐는데 김 감독이 보이지 않아 코치들끼리 밥을 먹었다. 한참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그 길로 퇴근을 했다. 김 감독은 끼니때도 잊은 채 박용준을 데리고 투구 연습 중이었고, 이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날 감독과 박용준만 운동장에 남아 있었고, 다음날 그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시즌 개막에 앞서 72승을 플레이오프 진출 승수로 예상하고 데이터 중심의 선수 기용 등 계산에 밝은 야구를 시도했다. 타선은 4점 이상을 뽑고, 마운드는 3점 이내로 막는다. 이런 계산에 따라 공격은 종전의 거포 중심 전술에서 벗어나 중심타선도 희생번트를 대는 진루 위주의 플레이로 바뀌었다. 이만수'김용철'박승호 등 힘 있는 타자들의 노쇠와 이종두'김성래 등 2세대 홈런타자들의 부상으로 중심타선의 공동화 현상이 초래됐고, 스몰 볼은 타격 부문 기록 산실로 꼽혔던 삼성의 이미지를 결국 퇴색하게 했다.
마운드는 '벌떼 작전'을 폈다. 후반기 들어 경기당 평균 3명 이상의 투수가 투입됐고, 35세 재일교포 출신 김성길은 7월 2일 롯데전에서 구원승을 거둔 이후 8월 15일 빙그레전까지 22경기에 등판(6구원승 14세이브 1무 무패)해야 했다.
그러나 선발진 사이에는 5이닝만 버티면 누가 막아 주겠지라는 식의 기대심리가 팽배했다. 이런 기류는 7월 11일 잠실 LG전에서 김상엽 완투 이후 시즌이 끝날 때까지 53경기서 단 한 차례의 완투경기도 없는 기현상으로 이어졌다.
1991년 삼성은 70승55패1무(승률 0.560)로 3위에 그치며 애초 '정규시즌 2위-플레이오프 직행-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김 감독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은 롯데와 4차전까지 가는 소모전을 치른 탓에 플레이오프에서는 빙그레에 1승3패로 패했다. 1992년에는 67승2무57패로 4위. 준플레이오프서 롯데에 2경기 연속 완봉패를 당하며 또 하나의 포스트시즌 치욕사를 보태고 말았다.
이 때문에 1990년 43만 명이던 대구 홈 관중은 1991년 35만 명으로 줄었고 1992년에는 31만 명으로 급감했다. 결국 김 감독은 임기 1년을 남겨두고 지휘봉을 내려놨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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