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18)성병조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의 창녕 성산

화력좋은 땔감 찾아 의기양양 나중에 당산나무인 줄 알고 충격

경남 창녕군 성산면 석정리 마을에 위치한 부용정. 학창시절 동네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틈틈이 책을 읽으며 꿈을 키우던 곳이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고목의 은행나무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부용정은 조선 중기 부용당 성안의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경남 창녕군 성산면 석정리 마을에 위치한 부용정. 학창시절 동네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틈틈이 책을 읽으며 꿈을 키우던 곳이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고목의 은행나무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부용정은 조선 중기 부용당 성안의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동네 앞으로 흐르는 도랑에서 이웃 아주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도 맑은 물이 그대로 흐른다. 이곳에서 대나무 통발로 물고기를 타작하던 그때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동네 앞으로 흐르는 도랑에서 이웃 아주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도 맑은 물이 그대로 흐른다. 이곳에서 대나무 통발로 물고기를 타작하던 그때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창녕 성씨 집성촌인 마을 앞에 300년 이상된 정자나무 숲.
창녕 성씨 집성촌인 마을 앞에 300년 이상된 정자나무 숲.
성병조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성병조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나는 고향, 부모님, 할머니, 그리고 어릴 적 소꿉친구와 그때부터 간직한 소망을 떠올리면 금방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잠긴다. 그 눈물은 소원했던 꿈이 이뤄지지 않은 데서의 아쉬움과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가난의 아픔에서 나오는 것으로, 때로는 자제하기 힘들만큼 격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 고향, 경남 창녕군 성산면 석정리(石亭里)는 이름 그대로 돌과 정자가 많아 돌무정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십여 가구 남짓한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현풍과 창녕의 중간 지점인 십이리에서 청도 풍각 방면으로 십리쯤 떨어진 산골로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무성한 마을이다. 예로부터 교육열이 높고 알뜰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면서 이사 오고 싶은 동네로 손꼽혔다.

인근 산에는 너구리, 노루, 토끼 등 산짐승이 많아 한국전쟁 후 미군들이 지프를 타고와 사냥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종종 늑대가 내려와 이웃집 돼지를 물어 가기도 하고, 산비탈 밭가에 뉘어놓은 아기를 해치는 등 맹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마을 아래는 1965년경 달성군과 창녕군을 끼고 조성된 광활한 달창저수지가 있고, 그 위로는 안심과 가복에서 발원한 맑은 시냇물이 마을 앞을 주야장천 흐르고 있어 하동(夏童)과 민물고기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지금도 어릴 적 고기 잡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마을 어른들은 나만 보면 고기 잡는 명수라고들 하였다. 다른 아이들은 빈손으로 돌아와도 나는 허탕 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고기마다의 특성을 훤히 꿰뚫고 었기 때문이다. 고기들도 기본 지능을 갖고 있다는 점과 미꾸라지의 대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먹지나 송어를 대열에서 분리시켜 나무 막대로 계속 몰아가면 나중에는 구정물이 이는 발밑으로 역주행하여 숨는 재능이 있고, 통발 안에서 용케 빠져나온 미꾸라지가 아래로 도망치면서 올라오는 놈들과 머리를 맞대고 교감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여분의 대나무 통발을 재빨리 아래다 설치해 놓으면 퇴각하는 고기들이 몽땅 걸려들곤 하였다. 구멍 속의 가재를 잡을 때는 손가락을 살며시 넣어 까닥 대면 앞발로 집는데 이때 못이긴 듯이 빼내면 그냥 달려나오게 된다. 나중에는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구입한 유리 통발로 피라미를 하도 많이 잡아오는 바람에 어머니를 성가시게 하였다. 가족이 먹지 않는 고기를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조차 고개를 돌리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물고기를 말려 큰집이 있는 부산으로 보낸 적도 있다.

창녕에서 일 학년을 마치고 현풍중학교로 전학한 데는 사연이 있다. 나이가 한두 살 아래의 약한 급우들을 자주 괴롭히는 한 친구를 혼내준 게 화근이 되어 문제는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저쪽에서 먼저 법정문제로 비화시키는 바람에 일 년 가까이나 시달려야 했다. 끝내 우리가 승소하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학교 교육도 이쯤에서 중단될 뻔했다. 내가 저지른 죄책감 때문에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묵묵히 농사일에만 전념했던 그 시절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소 구루마(수레) 끄는 일엔 소문난 아이였고, 밭 매고 고랑 치는 일은 물론 땔감도 매일 두 짐씩이나 해다 나르는 억척 일꾼이었다.

어느 날에는 나무할 곳이 마뜩잖아 산속을 헤매던 중 어렵사리 땔감의 보고(寶庫)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외쳤다.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소나무의 마른 가지는 매끈하고 불탐이 좋아 연료용으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날 한 나무는 다음 날이면 아버지가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쪼개 장작더미에 더해지곤 했는데 그 나무는 유독 뒷담 위에 걸쳐진 채 생솔가지로 가려져 있었다. 나중에 동갑내기 뒷집 머슴이 내게 건네준 말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하늘처럼 떠받드는 당산나무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린 자식이 기라도 꺾일까봐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지 않으셨다.

매일 경남북을 넘나드는 자전거 통학은 온갖 추억의 산실이다. 자갈과 먼지로 가득한 비포장 육십리 길을 꼬박 2년간 달리면서 체득한 인내와 끈기는 나의 성장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자갈로 뒤덮인 비포장도로의 먼지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이따금 자동차 바퀴에서 튀긴 돌이 자전거를 때리기도 하고, 길가에서 곤히 잠자다 자전거 소리에 놀라 뛰어든 개에 받혀 도랑으로 내동댕이쳐진 적도 있다. 샛길로 가는 날에는 길을 가로지르는 뱀들이 자주 띄어 놀라기도 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통학길이지만 결석이나 지각 같은 것은 한 번도 없었다. 타이어가 펑크나면 자전거를 끌고 달렸고, 차가 없으면 달리기를 해서라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때의 수련 덕분에 건강한 신체를 갖게 되었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조깅하고 공부하는 버릇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부산에서 고교를 마친 후 대학에서는 자립의 길을 걷고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대구로 훌쩍 떠나오고 말았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 소를 먹이거나 밭을 매고 소마구(외양간)를 치는 등 부모님의 일손을 많이 도왔다.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어 틈틈이 마을 앞 부용정(芙蓉亭)에서 책을 읽으면서 꿈을 키워나갔다. 수령 4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 아래로 펼쳐진 달창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부용정은 조선 중기 한강 정구(鄭逑)선생 의 문인이었던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지금은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가들의 조상숭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부용당은 1591년 (선조24)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창녕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607년 남원군수, 1612년(광해군4)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특히 그의 둘째 아들인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1595∼1664)은 춘향전 속의 암행어사인 이몽룡의 실존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연세대 설성경 교수론) 유년 시절 부용정은 원근 각지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로 유명했으며 요즘도 달창저수지를 찾는 낚시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창녕 양파이다. 60, 70년대 농촌의 대혁명이라 할 수 있는 양파가 창녕에서 처음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난에 찌든 농민의 주름살을 펴게 한 게 바로 양파로 보리농사에 비하면 열배 이상 수익이 높았다. 양파는 대지면 석리 출신의 성재경(成在慶) 씨가 1953년 일본에서 씨앗을 가져와 고향 마을에 재배한 것이 효시로 우리 마을에도 60년대 도입되어 가정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때 전국 생산량의 35%를 차지한 창녕 양파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동아일보(2000. 10. 20)에 '창녕 양파의 명성 되살리자' 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이어 경남신문과 창녕신문, 창녕문화원 회보 등에 쓴 칼럼을 통해 창녕에 양파 시배지 표지석과 홍보탑 건립을 촉구하였는데 이 모두가 관철된 것은 고향 사랑의 증표이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옛 추억을 그린 '봉창이 있는 집'에서 나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새삼 어릴 때 봉창을 통해 본 추억들이 젖은 가슴속을 소용돌이친다. 여름밤이면 작은 불꽃처럼 봉창을 날아다니던 반딧불이, 계절마다 다른 들의 향기와 가을의 푸른 사색을 봉창은 눈빛으로 일러주었다. 그리고 봉창은 봄이면 진달래 빛 창이, 여름이면 녹음 우거진 초록 창이, 가을이면 열매들을 주렁주렁 단 황금빛 창이 되었고 겨울이면 눈으로 하얗게 단장한 흰색 창이 되어 무수한 자연의 지혜들을 내 상상의 뜰에다 심어 주었다.

이제 어릴 적 함께 북적거리던 형제들과 부모님, 내 울음과 웃음들이 짙게 밴 흙집과 흙집의 외눈 같던 봉창은 수명을 다했는지 자꾸 허물어져 가고 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봉창 위에 손을 얹고 정겨운 목소리, 지나간 옛 이야기들을 함께 풀어놓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텅 빈집은 방문을 열면 농기구들과 잡동사니 빈 포대만 어지럽게 쌓여 창고가 되고 말았다. 아예 녹슨 문고리를 안으로 거머쥐고 입술을 굳게 다문 봉창은 바람이 불 때마다 외로움에 홀로 삐꺽거린다."

(수필가'대구고용노동청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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