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단순히 전문적인 기능인이 아니다. 위태로운 생명 앞에서 어려운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 판단은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하는 말기암 환자가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고 애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태어날 생명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임신부가 낙태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안락사를 도왔던 의사가 유죄 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 책은 이 같은 의료윤리와 관련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제시한다.
모든 안락사가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 안락사에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죽음 앞에서 고통받는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어떤 시술을 하는 것을 적극적 안락사라고 하고, 일정한 치료를 통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소극적 안락사라고 한다. 대체로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되는 편이다. 물론 여기에는 '환자에게 이로운 결정일 것'과 '환자의 요청과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환자가 적극적으로 죽음을 요청하고, 그것이 환자에게 이롭다고 하더라도 환자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둔 경우와 환자를 죽인 경우는 다르다.
의사 개인의 판단을 넘어서 정책적 판단문제도 있다. 제한된 자원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쪽을 지원해야 할 것인가, 위급한 한두 사람을 구해내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인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4형제 중 3형제가 전쟁에서 죽은 상황에서 전장에 있는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8명의 대원이 투입된다. 이들 중 일부는 희생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떤 심정일까. 다수의 관객은 '특정인 라이언을 구할 수 있다면, 익명의 다수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특정인(아는 사람 혹은 유명인) 누군가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해 사망자의 장기를 몽땅 투입할 것인가, 아니면 사망자의 장기를 익명의 3명에게 나누어 시술할 것인가의 문제에 닥치면 일반적으로 특정인을 살리는 쪽을 선택한다. 과연 이것은 생명윤리에 부합한가. 반대로 3명을 구하기 위해 1명을 포기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렵다.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은 객관적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더불어 생명의 존엄성을 숫자로 환치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의료윤리문제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공임신 시술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할까.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치료에 인권침해 요소는 없는가. 환자의 비밀유지를 위해 근처 사람에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해를 모른 척해도 되는가. 15세 소녀에게 피임약을 처방하는 것은 옳은가? 옳지 않다면 임신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이 같은 문제는 의사 개인이 해결하기 힘든 것들이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대안이 필요하고 정책적 판단과 법원의 판단, 시민의 정서적 판단 등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의료윤리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은이 토니 호프는 옥스퍼드대학교 의료윤리학 교수 겸 명예 자문 정신의학자로 보건의료행위의 윤리 및 의사소통을 위한 옥스퍼드센터 설립자이기도 하다.
216쪽, 9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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