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못쫓아가는 경찰수사

공중전화 박스를 이용해 보이스 피싱을 하고 있는 범죄자의 모습을 연출했다.
공중전화 박스를 이용해 보이스 피싱을 하고 있는 범죄자의 모습을 연출했다.

"아들 찾으려면 돈 보내"

#1. 대구은행 황제점 차정화 대리는 얼마 전 보이스 피싱을 예방한 공로로 대구 서부경찰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50대 여성이 이달 7일 다급하게 통화를 하며 대구은행 황제점을 찾았다. 이 여성은 이날 오전 '당신 아들을 납치했다. 2천만원을 당장 송금하지 않으면 아들을 살해하겠다'는 정체불명의 협박전화를 받았다. 이성을 잃은 여성은 '아들이 위험하다'며 청원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돈을 송금하려 했지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차정화 대리가 정신없이 통화 중인 CD기 앞의 여성에게 다가가 일단 '거래중지' 버튼을 눌렀다.

차 대리는 "고객에게 통화를 막으면서 전화사기를 안내했지만 매우 당황한 고객은 들을 여력이 없으신 듯 보였다"며 "일단 '거래중지' 버튼을 누른 후 차근차근 대처하도록 알려줬다"고 말했다.

#2. 회사원 이원수(가명'34) 씨는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던 중 갑자기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는 전화를 받고, 해당 사이트로 가서 개인정보를 재입력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공공기관의 전화인 줄 알고, 그대로 실행했다. 그 사이트도 공공기관 사이트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계좌에 들어와 있어 송금해 준 500만원은 자신의 명의로 된 카드대출이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으나 범인을 잡을 길도, 보상받을 길도 막막하다. 어이없이 뺏겨버린 500만원 때문에 그냥 냉가슴만 앓고 있다.

#3. 올해 8월 22일. 회사원 장익훈(가명'30대) 씨는 오후 4시쯤 대검찰청 직원을 사칭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사기범은 '수사를 해야 한다'며 장 씨가 검찰청 홈페이지와 유사한 피싱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유도했다. 장 씨가 별다른 의심 없이 피싱 사이트에 접속, 신용정보를 입력하자 사기범은 장 씨의 이름으로 공인인증서 재발급, 카드론 신청을 한 후 사기계좌로 이체해 3천500만원을 가로챘다.

적자생존이란 환경에 적합한 것만이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멸망한다는 자연과학 이론이다. 이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범죄에도 해당된다. 아무도 속지 않는 식상한 유형의 보이스 피싱은 사라지고 강력한 신종 보이스 피싱의 유형은 계속 진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보다 해괴하고 악랄한 형태의 보이스 피싱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은 가능하다.

◆적자생존(適者生存) 방식으로 진화

☎"귀하의 개인정보가 유출됐습니다. 이곳에 접속해 재입력해 주십시오."☎

입력을 하는 순간 요즘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이 시작된다. 교묘하고, 교활하고, 간악한 범죄자들은 먼저 그 개인정보를 이용해 카드론을 받은 다음, 피해자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당신 계좌에 수백, 수천만원의 돈이 이체돼 있는데, 그 돈을 다시 이 계좌로 송금해 주세요.". "네, 확인해보고 보내겠습니다."

백발백중 피해자의 계좌에는 본인도 모르는 돈이 입금돼 있다. 바로 교활한 범죄자가 피해자의 정보를 이용해 카드론이나 대부업체로부터 대출받은 돈이다. 본인이 갚아야 할 빚을 범죄자에게 송금해주는 꼴이 된 셈이다. 진화하는 보이스 피싱에는 이런 맹점도 있다. 카드론 또는 대부업체가 피해자들의 이런 개인정보만으로 쉽게 대출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단박 대출'이 '단박 범죄'로 연결되는 것이다.

☏"자녀가 납치됐으니, 돈을 이 계좌로 빨리 입금해!"☏

2인조로 이뤄지는 납치 가장 보이스 피싱 유형이다. 부모와 자녀의 휴대전화 번호를 동시에 알아낸 뒤, 한 명이 부모를 협박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 명은 그 자녀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통화 중을 만들어 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험신호를 감지토록 하는 방식이다. 이에 더해 다급한 상황에서 녹음기를 틀어 '엄마! 살려줘!'라는 목소리를 들려주게 하면, 부모는 자녀의 목소리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은행이나 인터넷, 텔레뱅킹을 통해 송금을 하게 된다.

30여 가지 보이스 피싱 유형 중 가장 광범위하고 흔하게 발생하고 있는 2가지 유형의 사례들이다. 일단 감쪽같이 속기 쉽도록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인 '믿음'과 '가족'이라는 틈을 파고들고 있다. 이런 보이스 피싱을 처음 겪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속아 넘어갈 확률이 높다.

◆대구도 보이스 피싱 위험지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서 빈발하던 보이스 피싱 피해 사례가 대구에서도 속출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뿐 아니라 발생빈도도 높아져 대구지방경찰청과 대구지검까지 특별 대책반을 수립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대구경찰청은 지난달 초부터 광역수사대 형사 6명으로 '보이스 피싱 수사 전담팀'을 꾸리고, 전화금융 사기 근절을 위해 금융감독원 대구지원'대구의 금융기관 간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대구지검도 시'도청 및 경찰, 세관, 금융감독원, 출입국관리사무소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갖고 불법 다단계 및 보이스 피싱 사범에 대한 철저한 단속과 처벌을 다짐했다. 대구지검 강여찬 형사2부장 검사는 "최근 급진화한 보이스 피싱 행위가 증가 일로에 있다"며 "사건분석과 각 기관별 정보 공유를 통한 긴밀한 협조체제 유지로 피해 예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대구에서 발생한 '전화 금융사기' 범죄 피해는 모두 634건이며, 피해액은 67억여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올 1월부터 7월까지 피해자 성별은 남자 130명, 여자 145명이다. 연령대별은 ▷20대 20명 ▷30대 26명 ▷40대 62명 ▷50대 104명 ▷60대 47명 ▷70대 16명 등으로 50대 피해자가 가장 많았으며, 40~60대가 전체 피해자의 77.5%(213명)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발생 시간대는 오전 시간(9~12시)이 전체건수 275건 가운데 170건(61.8%)이나 됐다.

이렇듯 보이스 피싱 피해는 크게 늘고 있는데 경찰의 검거 성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화 금융사기 범죄자들이 점조직 형태이며 교묘한 수법으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때문에 검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경찰 측의 해명이다.

대구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서윤재 경위는 "주로 대만인이나 중국인으로 구성된 범죄 총책을 중심으로 전화를 거는 콜센터 운영팀, 국내 계좌 개설팀, 현금 인출팀, 현금 송출팀 등으로 역할을 분담, 범행을 저지르고 있어 추적이 쉽지 않다"고 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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