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블랙박스

블랙박스는 내부의 구성이나 작동 원리가 숨겨진 장치를 일컫는 공학 용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항공기의 비행 기록 및 음성 녹음 장치를 뜻한다. 1956년 호주의 항공 과학자 데이비드 워런이 개발한 '플라이트 데이터 레코더'(FDR)가 그 원형으로 항공기 사고 원인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다. '이벤트 데이터 레코더'(EDR)로 불리는 영상 녹화 장치인 차량용 블랙박스나 폐쇄회로(CC) TV도 일종의 블랙박스다.

블랙박스가 아무리 꼼꼼하게 전후 상황을 기록하더라도 의도적으로 기록을 지우거나 훼손할 경우 증거 자료로서 소용이 없다.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후 경찰이 도착하기 전 블랙박스 기록을 삭제했다가 구속된 버스기사의 사례나 보육교사가 아이를 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지웠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훼손된 영상을 복원해 내는 바람에 구속된 어린이집 원장 사례는 블랙박스의 한계를 말해 준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일단 진실을 감추고 거짓말하는 게 인간 본능이다.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블랙박스나 폐쇄회로 TV에 기록되고 있다면 이를 달갑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기록돼 대중에 공개된다면 누구나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노당 강기갑 의원이 국회 외교통상위 회의실에 설치된 폐쇄회로 TV를 신문지로 가리는 장면이 보도됐다. 그는 2009년 1월 미디어법 개정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 상황에서 국회 사무총장실에서 벌인 '공중 부양'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전력이 있다. 이를 의식한 때문인지 이번에는 야당 의원들이 점거 중인 회의실의 폐쇄회로 TV를 원천 봉쇄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회의실 내부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의도라고 하지만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서의 물리적 충돌에 대한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유야 어떻든 이 같은 꼴불견은 대한민국 국회의 수준을 말해준다. 금배지를 달고 어깨에 힘주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에 쏟아질 비난을 의식한 나머지 아예 국민의 눈을 가리겠다는 발상에 쓴웃음만 나온다. 여야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회의실을 완벽한 밀실로 만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겠다는 심산도 보기 불편하거니와 국민이 알아야 할 사실마저 가리려는 현 정치 상황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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