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TV영화] EBS 일요시네마 '뮤직박스' 27일 오후 2시 30분

마이크는 근 50년 전 이주한, 미국에 완벽히 정착한 헝가리 출신 이민자다. 그는 성공한 변호사인 딸 앤과 그를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평온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러시아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마이크는 악랄한 헝가리 전범으로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된다. 모든 게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단호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아버지를 위해 앤은 직접 그를 변호하기로 마음먹고, 부단한 노력 끝에 결국 원고 측 증인들의 증언을 뒤집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여긴 바로 그 순간 진정한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버지의 군 동료를 찾아 나선 앤은 그의 누이를 통해 건네받은 어느 뮤직 박스 안에서 추악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발견하고 만다.

'뮤직 박스'는 나치가 지배했던 유럽의 암흑기를 소재로 쓰고 있지만 시대적 비극보다는 인간의 양면성을 조명하는 데 치중한다. 오랜 세월 가정에 충실한 삶을 유지하며 주위의 신뢰와 애정을 한몸에 받게 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흉악한 전범으로 기소된다는 설정에서부터 주제는 확연히 드러난다. 제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주변인들에게 추앙받는 남자가 과연 남의 자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고문하고 그걸 즐길 수가 있었을까?

감독인 코스타 가브라스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외친다. 추악한 괴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재판에서 피고이자 아버지의 변호를 맡게 된 딸 앤에게도 여지없이 같은 시각이 적용된다.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아버지가 그런 괴물이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에 법정공방에 뛰어든 그녀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뒤엎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법을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피고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변호사인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실제로는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가 된 것이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제시카 랭의 연기가 돋보인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는 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변호사 앤을 세련되고 능숙하게 그려냈다. 끔찍한 과거를 감추고 수십 년간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살아온 마이크 역할의 독일 출신 배우 아민 뮐러 스탈의 연기 또한 주목해 볼 만하다. 러닝타임 125분.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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