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승효상(59)과 대구라는 도시의 인연은 해 질 녘 노을처럼 짙어지고 있다. 대구와는 아무런 연(緣)이 없는 줄 알았지만 막상 인터뷰를 해보니 대구와 정(情)이 두텁게 쌓여가고 있었다. 의외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구에 이미 그가 설계해 지어진 개인 사저(태창철강 대표가 주인)가 북구 산격동에 있었으며, 대구특수금속의 신개념 건물도 한창 설계 중에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대구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대구에서 활약상은 이뿐이 아니었다. 벌써 1년째 매일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대구시의 도시계획과 관련된 일을 위해 수시로 세미나 등에 자문역이나 패널로 참석하고 있다. 심지어는 한 달에 서너 번 대구에 들를 정도로 대구 관련 일이 많을 때도 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주저 없이 KTX를 타고 대구로 내려온다. 그리고 혼자서 택시를 타고 시청, 신문사, 대구스타디움 등 대구시내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다닌다.
또 하나 숨은 인연도 있었다. 승효상의 장모가 경북여고 출신의 대구 사람이라는 것. 따라서 처가의 뿌리는 대구라는 생각에 항상 처갓집에 들른다는 반가운 기분으로 내려온다. 이래저래 대구가 좋아지고 있는 승효상. 이런 그를 6일 점심식사를 겸해 2시간여 동안 만났다. 그는 소탈함 그 자체였으며, 깊은 내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건축가 승효상'의 속 깊은 세계로 흥미로운 탐방을 해 보자!
◆희귀 성을 넘어 희소가치 지닌 승씨
승효상의 성(姓) 때문에 2번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 2천800여 명뿐인 연일 승(承)씨란다. '아하! 이런 성도 있구나.' 한 가지 알아냈다. 연일(延日)은 경북 포항시 영일읍(迎日邑)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근오지현 또는 오량지현이라 불렸다가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영일현(迎日縣)로 개칭됐다. 1896년 경북 연일군이 되었다 이후 영일군으로 통폐합됐다. 이곳 연일이 승씨의 본(本)이다. 해방 이후 유명한 인사로는 본인과 승은호(69'동남아의 한인 거상으로 코린도 그룹 회장) 두 사람 정도다. 정말 희귀한 성이 분명하다.
더 놀란 것은 이 희귀한 성에 또 다른 본(本)인 남원 승(昇)씨가 있다는 사실이다. 승효상의 본(本)인 연일 승씨보다 더 희소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의하면 남원 승씨는 183가구 총 61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1년 전 연일 승씨는 남원 승씨보다는 3배가량 많았다. 2011년 현재 연일 승씨와 남원 승씨를 다 합해도 5천 명이 되지 않는다.
희귀한 성을 가진 승씨 가문에서 건축가로 우뚝 선 승효상. 그의 활약상은 스타급 건축가로 발돋움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부산 서대신동 3-184번지으로 피란을 왔다. 7가구가 살아가는데 우물 하나, 변소 하나뿐인 곳에서 어렵게 자랐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학업에 뜻을 두고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빈자의 미학'이란 닉네임을 얻은 대한민국 최고 건축가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우뚝 섰다. 2002년은 세상에 희귀 성을 가진 건축가 승효상을 알린 뜻깊은 해였다. 파주출판도시의 코디네이터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데 대해 미국건축가협회는 명예 펠로우의 자격을 부여했고, 건축가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건축가 승효상전'을 열기도 했다.
◆'내 속에 너 있다', 멘토'스승 김수근
'당신을 이기겠다.' 건방진(?) 승효상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1세대였던 고(故) 김수근(1931∼86) 건축가의 제자였지만 스승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래서 김수근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5년 동안 함께 일했다. 건축가로서 스승을 뛰어넘겠다는 일념으로 일에 매달렸다. 김수근은 이런 문하생 승효상을 건방지다는 생각보다는 대견스럽게 또 한편으로 어여쁘게 여겼다.
"아직도 김수근 스승이 꿈에 생생하게 나타나 저와 교감을 나눕니다. 제 속에 살아숨쉬는 것이 분명하지요. '계몽적 전제군주'라는 별명답게 항상 확신을 갖고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내년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한번 더 폭발하는 해가 될 것 같습니다. 흑룡이 날 듯 한번 더 비상하겠지요. 2002년의 화려했던 희소식들(각종 수상, 세상에 승효상을 알림 등)처럼요."
15년 동안 까무러칠 일들도 몇 번 있었다. 스승은 1977년 마산성당 설계 당시 경력도 많고, 직위도 높은 실장을 제치고 이제 2년차인 승효상에게 설계 프로젝트를 모두 맡겼다. 이 실장은 사표를 제출하고 떠났다. 하지만 스승의 눈은 정확했다. 둘은 대한민국 현대적 개념의 성당 1호를 만들어냈다. 승효상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인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승효상을 단련시킨 시간이었다. 스승이 타계하던 당시 35세이던 승효상은 '공간'의 대표이사가 되었지만 회사 재무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스승은 빚만 30억원을 남겨주고 떠났던 것. 이때부터 그는 회사를 살리는 데 주력했다. 로비도 해보고, 상업적으로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그때 3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죠. 아마 스승은 아끼던 제자 승효상을 더 단련시키기 위해 빚만 남겨두고 떠났겠죠. 그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하고 나니,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까칠'도도한 남자, 승효상
6일 대구달성문화재단 김채한 대표이사와 함께한 오찬 자리에서 승효상은 앉자마자 대구에 대해 '폐쇄적'이라는 말문을 열었다. 김채한 대표이사는 당장 '이유나 근거가 뭐냐'고 따져 물었고, 그는 "대구는 이너서클(주도적 집단)에 들어오지 못하면 뭔가를 하기가 힘든 곳"이라며 "건축가로도 대구시의 자문에 많이 응하지만 대구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어 김 대표이사가 '대구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할 때 대구 사람을 안 쓰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자, "외지에서 온 전문가지만 대구에 대해 애정을 갖고 충분히 연구하고, 열린 사고로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대구에 더 좋은 건축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반론을 폈다. 첫 자리였는데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랬다. 승효상은 자신의 생각을 어디에서든 표출할 줄 아는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이었다.
승효상이 까도남인 이유는 '도시계획의 공적 1호'라고 불리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도시계획을 할 때, 틀에 박힌 사고와 제도를 깨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지만 번번이 공무원의 원리원칙적 사고에 막혀 좌절하거나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까도남 승효상은 자신의 생각을 저버리는 일이 없다. 어딜 가나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표출해 기꺼이 공공의 적이 되어준다.
건축의 활로는 이미 해외에서도 개척중이다. 승효상은 그의 건축회사인 '이로재'(履露齋'IROJE)를 서울뿐 아니라 중국 베이징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중국에서도 승효상은 실력 있는 건축가로 알려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원묘지 역시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은 벌써 아름다운 공원이자 추모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빈자의 미학'(1997년)이란 책으로도 유명한 그는 이후 '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1999년), '승효상 작품집'(2001년), '건축, 사유의 기호'(2004년) 등의 건축 명저도 남겼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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