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奈良)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일본 최고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다. 절내에 있는 대불(大佛)은 너무나 유명하다. '대불만 있으면 나라는 (먹고사는 데) 걱정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이 고도의 상징이다. 한국 관광객로 들끓는 곳이지만, 도다이지 창건과 대불 조성에 신라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는 한국인은 아주 드물다. 도다이지가 창건된 1천2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신라인들의 뛰어난 활약상을 살펴보자.
◆ 나라에서 꽃핀 신라 불교
도다이지는 남대문(南大門)에서부터 시작된다. 남대문은 한국 사찰의 산문(山門)에 해당하는 출입구로, 12세기 말 중건된 오래된 건축물이다. 그 앞에 뿔 달린 사슴떼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붕을 올려다 보면 꼭대기에 '대화엄사'(大華嚴寺)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일본 화엄종의 본산이기 때문일까.(현재 일본의 화엄종 사찰은 도다이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화엄종이라면 신라 불교를 빛낸 원효와 의상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이 절은 원효와 의상의 화엄종 정신을 바탕으로 만든 사찰이다.
일본에 화엄종을 전한 이는 신라 스님 심상(審祥·?~740)이다. 도다이지가 창건되기 전인 733년 경부터 이 자리에는 곤슈지(金鐘寺)가 있었다. 신라에서 건너온 학승 심상이 쇼무천황의 요청에 의해 곤슈지에서 740년부터 742년까지 2년간 화엄경을 강설했다. 이를 기점으로 화엄경이 일본 전역으로 퍼졌다. 심상의 화엄경 강설 3년 뒤에 열렬한 화엄 신도였던 쇼무(聖武) 천황이 호국사찰인 도다이지 창건을 명했다. 심상은 의상 대사의 제자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이 부분에 대한 도다이지의 입장은 다소 달랐다. 도다이지 역사연구원 반도 도시히코(坂東俊彦'41) 박사는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심상 스님이 신라인인지, 신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일본인인지 확인되는 것은 없다" 면서도 "창건 당시 원효의 저서를 대거 사경(寫經)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미뤄 신라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실은 분명하다"고 했다.
◆ 한국 사람이 만든 대불
도다이지의 대불은 장중하다. 대불전(大佛殿)에 들어서면 워낙 큰 탓에 전체 모습이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아래나 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끊어 봐야 한다. 16m가 넘는 높이에 얼굴 길이만 5m이고 무게가 무려 300t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16명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다. 대불 사업은 당시 일본 전체 인구(500만 명 추정)의 절반 이상이 동원될 만큼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다. 이를 지휘 감독하고 기술을 제공한 것은 한국사람들이었다.
시가현립대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59) 교수는 "8세기에 일본은 대불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용광로가 없었고, 그런 고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며 "한반도에서 도래한 신라, 백제, 고구려 출신 기술자들이 대거 동원돼 대불을 만들었다"고 했다. 당시 금, 은, 동, 철을 제조할 수 없어 신라의 도움으로 재료와 기술을 얻었다는 견해가 많다.
대불 조성 총책임자는 고구려 유민출신인 고려복신(高麗福信)과 백제계 3세인 국중공마려(國中公麻呂)였고, 대불전 전각을 처음 세운 건축가도 신라계 이나베노 모모요(猪名部百世)였다. 세계 최대 목조건물인 대불전은 현재 높이 48m정도이지만 에도시대인 1709년에 중건된 것이고 751년 처음 만들어질 때는 높이 70m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금동불상을 위해 황금 900냥을 시주한 이도 백제왕족 출신으로 의자왕의 4대손인 경복(敬福)태수였다. 도다이지 창건은 이름높은 행기(行基)스님이 모금을 맡았기에 가능했다. 행기 스님은 백제인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생불 같은 고승이었으며 쇼무천황도 나중에 출가해 제자가 되었다.
◆ 대불 개안식에 방문한 신라인들
752년 4월 9일 나라 전역은 온통 시끌벅적했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9년 만에 완성된 대불 개안식(開眼式)이 열렸기 때문이다. 쇼무천황과 문무백관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1만 명의 승려가 참불했으며 모든 음악인이 소집돼 동서로 나뉘어 모든 종류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행사였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속일본기'에는 700여명의 신라사절단이 개안식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것이다. '신라사절단이 753년 윤 3월 22일에 후쿠오카에 도착해 7월 24일경에 귀국했다'고 쓰여 있다. 실제 개안식에 참석한 신라인은 170여 명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일본 왕족'귀족들은 신라사절단이 가져온 물건을 사기 위해 주문서를 제출했다. 일본 황실 보물창고에 '매신라물해'라는 문서가 남아있다. 왕족'귀족들은 신라사절에게 불교용품과 금, 베, 옻, 염료, 가죽류, 안료, 향료, 한약 등을 샀고, 그 대가로 면, 흑면, 견사 등 섬유제품을 건네줬다. 일본과 신라 간에 물물교환의 수준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신라사절은 7척의 배에 싣고 온 물건을 모두 팔고 귀국했다. 이들은 겉모습만 축하사절이었을 뿐 대규모 구매사절단이었던 셈이다. 당시 통일신라는 막강한 국력과 강력한 해상력으로 동북아지역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반도 도시히코 박사는 "대불 개안식은 사상 최대 행사인데다 (백제로부터) 불교 전래 200년이 되는 해였기에 통일신라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의 정부 및 불교 관계자를 대거 초청했다"며 "신라사절단은 상인 위주로 구성돼 장사에 치중한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고 했다.
◆ 가라쿠니 신사
대불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50, 60m 정도 가면 언덕에 자그마한 사당이 눈에 띈다. 뚜렷한 특징 없는 그저그런 사당이지만 대가람과 붙어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사당 앞 비석에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일부에서는 도다이지 창건에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준 신라 스님 심상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일본 여러 곳에서 목도한 일이지만, 한국과 관련된 이름은 언제부터인지 정체불명의 신국(辛國)이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신국'은 일본말로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취재진을 안내한 도다이지 서무과 직원 코세이 스즈끼(29) 씨는 "원래 한국신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의 사찰과 신사에서는 발음이 같을 경우 한자를 바꿔 쓰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이 가람은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는데도 사찰 어디에도 그런 표시가 없다. 좀 억울한 일이긴 하지만, 이 절은 고대 한반도인들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구경하는 재미가 훨씬 더 있지 않겠는가.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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