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대구 요정'기생의 부활

'약방기생회 회원 39명이 현금과 패물 등 20여 원을 기탁했다.'(2월 28일), '궁내부 기생 모임의 기녀 40명이 24원을 맡겼다.'(3월 8일)

1907년 2월부터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엔 기생(妓生)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과 패물 등을 일본에 진 빚 1천300만 원을 갚는 데 쓰라고 내놓았다는 기사들이 보도됐다.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남녀노소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너도나도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기생 또는 기녀(妓女)들은 술자리나 연회에서 흥을 돋우며 시와 노래, 악기 등에 능한 예인(藝人)을 일컬었다. 흔히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해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했지만 세상은 이들을 천한 사람으로 여겼다. 유교에 바탕을 둔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은 기녀를 사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공장(工匠)과 함께 여덟 천인(八賤)으로 차별했다. 한번 기녀가 되면 자녀는 아들은 노비, 딸은 기녀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기록엔 수많은 기녀 이야기가 있다. 신라 통일의 주역 김유신과 사랑을 나눈 천관녀, 뛰어난 작품을 남긴 조선의 황진이, 의기(義妓)로 이름을 남긴 논개 등 많고 많다. 특히 제주의 관기(官妓)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지금도 추앙의 대상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가로서, 그는 제주에 가뭄이 들자 전 재산을 내놓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여자는 제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에도 불구, 정조 임금의 명으로 한양과 금강산 유람을 하고 벼슬도 제수받았다.

조선 패망으로 옛 기녀 제도는 없어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번성한 요릿집이나 소위 요정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대구는 그 요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생기고 영남 내륙의 교통, 행정 중심이 되면서부터였다. 130여 개가 명멸했다고 한다. 100년 역사의 대구 요정과 기생은 국채보상운동, 일제 식민, 광복, 전쟁, 산업화 등 우리 역사의 궤와 함께하다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대구의 한 요정이 그 100년사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전시물을 만들어 옛 대구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고, 대구 일각에서는 요정과 기생 이야기를 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옛것이 자꾸 없어지는 요즘, 그늘지고 가려졌던 옛 자취도 자원화되는 시절이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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