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 물레길] ⑩'조선시대 물산 요충지' 사문지 나루

대구에 처음 들여온 피아노 하역, 건반 치자 구경꾼 화들짝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문진 나루터. 2009년 총사업비 400억원을 들여 옛 사문진 나루터 위로 교량 780m, 연결 도로 670m를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 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문진 나루터. 2009년 총사업비 400억원을 들여 옛 사문진 나루터 위로 교량 780m, 연결 도로 670m를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 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됐다.
옛 사문진 나루터에 현대식 목재데크를 설치한 모습.
옛 사문진 나루터에 현대식 목재데크를 설치한 모습.

1901년 5월 어느 날 화원 사문진 나루. 조잡하고 엉성하게 포장된 피아노 한 대가 조운선에서 땅에 내려지고 있었다. 인부 20여명이 달려들어 피아노를 옮기는 모습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에 앞서 미국에서 신기한 소리통이 낙동강을 통해 들어 온다는 소문이 나루터 주변 마을에 쫙 퍼졌다. 마을사람들은 신기한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나루터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당시 기독교 선교활동을 위해 선교사들이 세운 제중원(대구 동산기독병원 전신'지금의 제일교회 자리) 원장 부인이었던 에디스 파커는 구경나온 주민들을 위해 일부러 오른쪽 검지손가락으로 건반의 가장 높은 음과 가장 낮은 음을 쳐주었다. 사람들은 나무통 속에 죽은 귀신이 들어앉아 있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고 한다.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대구지역에 들어온 피아노는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유아기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악기가 됐다. 당시 30여 명의 인부들에 의해 소달구지로 옮겨진 피아노는 1907년 동산병원 옆 동산언덕에 신명여학교를 세운 미국 여선교사 마르타 스콧 브루엔(Martha Scott Bruen)을 통해 학교에 기증되기도 했다.

사문진 나루터의 위치를 두고 누구는 이쪽, 또 다른 사람은 저쪽이라며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일이 다반사다. 물길 따라 나루터는 바뀌기가 일쑤였다. 꼭 정해진 자리가 없었다. 비가 많이 와서 나루터 모래가 쓸려 내려가거나 날이 가물어 강물이 줄어들면 그때그때 나루터 자리도 왔다갔다했다.

사문진 나루터는 화원토성의 야산 기슭인 현재의 화원읍 구라3리 쪽에 위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50, 60대 밑의 젊은이들 가운데 사문진 나루터와 관련된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거의 없다.

사문진 나루터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와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와 마주보고 있었다. 사문진교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고령의 다산지역 주민들이 대구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상류인 성주, 인동, 선산, 상주, 안동지역과 하류인 달성 현풍, 합천 초계, 의령, 창녕, 영산, 밀양, 김해지역 등 낙동강을 따라 유입되는 물산의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까지만해도 돛단배나 범선이 드나들며 대소비지인 대구까지 물품을 실어날랐던 곳이기도 하다.

사문진 물산의 4할 정도는 대구시장에서 소비됐다. 나머지는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조선 성종 때는 관청과 민가에서 사용하는 일본 상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문진에 왜물고(倭物庫)라는 창고가 설치됐다. 일명 화원창(花園倉) 이다. 조선의 대일 무역은 사신왕래 등을 통해 행해지는 공무역과 상인들끼리 직접 거래하는 사무역이 있었다.

당시 사무역은 외국 상품의 필요 이상 유입과 금'은'인삼 등의 지나친 유출, 국내정보 유출, 상인 간의 충돌 등이 도를 넘자 조정은 사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공무역만 허용했다. 공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물량을 수송보관할 장소가 필요했고 조정은 서울과 부산의 교통 요충지인 사문진에 왜물고를 설치했다.

남해안을 통해 들어온 일본 상품은 모두 국비로 매입, 나룻배에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7, 8일 만에 사문진에 도착해 왜물고에 보관됐다. 이중 일부는 서울의 왕실 관아에 보내고 나머지는 국내 상인들에게 매매됐다.

사문진은 왜물고 설치 이후 공무역의 폐단으로 인한 사무역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조선 유일의 나루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때 무역품들은 수입품으로 말, 금, 은, 구리, 철, 납, 장뇌, 설탕, 소금, 물소뿔, 상아 등이었고, 수출품으로 모시, 삼베, 모피, 인삼, 꿀, 잣, 화문석, 서적, 문방구 등이었다.

특히 강에는 나루가 있기 마련이고, 또 나루엔 항상 시장이 형성됐다. 시장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있어 항상 북적대곤 했다. 사문진 나루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거래를 주선했던 상인이 있었다. 바로 보부상이다. 사문진 나루터의 대표적인 상단을 이룬 것이 바로'고령상무사'였다.

사문진 나루는 영남 내륙의 성주장, 김천장, 대구의 약령시를 잇는 통로다. 낙동강을 통해 창녕, 동래, 부산, 일본과도 연결되는 교통요지였다. 이처럼 고령상무사 소속 보부상들은 사문진을 기반으로한 상단 활동 범위를 전국적으로 넓혀 나가게 된다.

사문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배는 처음에는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조그만 목선이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동력선은 10t 규모로 승객 60명과 자동차 6대를 동시에 운반할 수 있는 규모였다. 배는 두 척을 들여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한 시간에 서너 번, 승객이 없는 낮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운항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9시까지 고령 호촌리에서 건너편 달성 화원유원지 버드나무 밑 나루까지 하루 70회 정도 왕복하면서 평균 10여 대의 자동차와 1천 명 정도의 사람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1인당 500원이었는데, 고령쪽 사람들에게는 돈 대신 연간 이용료로 곡물을 받았다.

뱃사공들의 고충을 아는 인근 주민들은 간혹 막걸리를 받아주며 그들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뱃삯으로 정기적으로 주는 나락이나 겉보리 외에 명절에는 특별 보너스처럼 삯을 따로 챙겨 주기도 했다. 당시 도선 운영권도 입찰로 정해졌다. 입찰 금액만도 1억5천여만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모래찜질을 하기 위해 대구 시민들이 사문진 모래사장으로 몰려들었다. 1978년 8월 모래찜질이나 낙동강 물놀이를 위해 사문진 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천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나룻배를 모는 뱃사공도 인기직종으로 벌이가 남들 못지 않았다. 배의 크기에 따라 적게는 8명. 많게는 15명의 뱃사공이 있었다. 그 중 2, 3명은 언덕이나 암벽 등에 배가 부딪치지 않도록 막대기로 밀어내는 조수역할을 했다.

사문진 나루에는 대남여인숙이 있었다. 1970년대 초 경산 하양이 고향인 김씨 성을 가진 한 농민이 사문진으로 이사를 왔다. 김씨는 고향에서 짓던 기장 농사를 폐농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여기 와서도 처음 10여 년 동안은 농사를 지었지만 도무지 소득이 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나루터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더 마련하고 여인숙을 차린 것이다. 여인숙 자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를 팔던 주막집이었다.

이곳은 대구와 다산면을 잇는 통로인데다 강 건너가 바로 대구여서 지역의 관공서와 학교에 근무하는 이들 중에는 대구에서 통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붕과 기둥만 온전했던 집에 문틀을 달고, 방 다섯 개를 넣었다. 마당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는 보관대도 만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여인숙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그때만 해도 이 지역에는 면사무소 외에 학교만 4개교가 있을 정도로 번성한 곳이었다. 교사들은 여인숙에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맡겨 두고 배를 이용해서 대구 집을 오갔다. 주민들은 대구로 볼일을 보러 가면서 자전거를 맡기기도 했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식사도 제공하면서 이들의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맡아 주고 매달 보관료를 받아 살림을 꾸렸다. 오토바이는 한 달에 1천500원, 자전거는 한 달에 700, 800원을 받았다. 스무 대 정도는 아예 단골로 묶어 두었고, 대구에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의 자전거가 쉴 새 없이 밀려 들어왔다.

방 다섯 개는 어쩌다 마지막 배를 놓친 사람들이 묵고 가는 곳이었다. 방값은 2천원이나 3천원씩 받았다. 집에서 나루터까지의 거리가 300m쯤 떨어져 있었지만 물이 많을 때면 물이 집 앞까지 차올라 대문 앞에 배를 댈 때도 있었다.

김 씨는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자전거와 오토바이 보관업을 겸해 슬하의 5남매를 키우고 출가까지 시키면서 그럭저럭 10년이 훌쩍 지났다. 1993년 이곳에 다리(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배가 다니던 두 지역은 육로로 연결됐다. 대구에서 통근하던 사람들이 맡기던 오토바이와 자전거의 숫자가 날이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세월이 흘러갔고 지금은 대남여인숙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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