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古宅은 살아있다] <12>영양 두들마을

은둔지에서 펼친 救貧 '가진자의 의무' 산교육 생생

영양 두들마을의 석계고택을 보면 석계의 청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전통적인 口자 구조와 달리 곳간채 등을 두지 않고 안채와 사랑채만으로 二자형으로 간소하게 배치했다. 지붕은 단출한 맞배지붕이다. 곳간채 자리에는 담장을 쌓아 양반 가옥의 口자 형태를 겨우 취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마치 이중 담장처럼 보인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영양 두들마을의 석계고택을 보면 석계의 청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전통적인 口자 구조와 달리 곳간채 등을 두지 않고 안채와 사랑채만으로 二자형으로 간소하게 배치했다. 지붕은 단출한 맞배지붕이다. 곳간채 자리에는 담장을 쌓아 양반 가옥의 口자 형태를 겨우 취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마치 이중 담장처럼 보인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지난 2001년 두들마을 이문열 생가 인근에 들어선 광산문학연구소. 문학강연, 세미나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2001년 두들마을 이문열 생가 인근에 들어선 광산문학연구소. 문학강연, 세미나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장계향 선생이 쓴 우리나라 최초 한글요리서인
장계향 선생이 쓴 우리나라 최초 한글요리서인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요리. 음식디미방보존회가 이를 재현해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석계선생 부부가 1631년 이곳에다 터를 잡으면서 구빈(求貧)을 위해 심었던 도토리 나무. 지금도 50여 그루가 남아 있다.
석계선생 부부가 1631년 이곳에다 터를 잡으면서 구빈(求貧)을 위해 심었던 도토리 나무. 지금도 50여 그루가 남아 있다.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은 검소함이 깃들어 있다. 이 마을에는 자녀와 이웃, 심지어 노비들까지 따뜻함으로 교육하고 훈화했던 여중 군자가 살았다. 대의를 굳게 가졌던 선비의 청빈한 삶이 전해오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영양 땅에 은둔했던 재령 이씨 문중의 석계 이시명과 그의 부인 안동 장씨 계향. 이들 부부에게 은둔은 주저앉음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가학'(家學)과 '구빈'(救貧)하는 삶으로 대명절의의 뜻을 폈으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두들마을은 370여 년 전 석계 선생 부부가 발을 들여놓으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가정교육'의 모범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언덕 위 마을에는 '글, 사람, 맛의 향기 감돌고'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다'는 뜻이다. 강을 끼고 깎아지른 절벽이 마을을 떠받치고 있다. 영덕 사람 이시명(李時明'1590~1674)이 1640년에 들어와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스스로 '석계'(石溪)라 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선생과 그의 후손 재령 이씨의 집성촌이다. 석계고택(경북도 민속자료 제91호)과 석천서당(경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유우당(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85호), 주곡고택(경북도 민속자료 제114호) 등 30여 채의 고택이 있다.

특히 이곳은 몇 해 전부터 문화재와 고택들이 말끔하게 보수'보존되고 있는데다 광산문학연구소, 북카페,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정부인 안동 장씨 예절관 등 현대식 전통가옥들이 새롭게 들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석계 선생은 1612년 소과에 급제했으나 혼탁한 정치와 병자호란의 치욕에 비분강개해 두들마을로 들어왔다. 당시 4남 모두가 경학이 뛰어나고 행실이 착해 명성이 알려졌으며 스스로 '가학'(家學)에 전념했다. 선생은 1653년부터 수비면 신원리 수양산으로 들어가 은거했으며 이때 영산서원을 짓고 후학을 길렀다. 수비에서 20년을 살다 안동 대명동(지금의 풍산읍 수곡동)으로 이사해 이듬해 돌아가셨다.

그의 부인 장계향(張桂香'1598~1680)은 1598년 안동 장흥효의 딸로 태어나 1616년 이시명과 결혼해 6남 2녀를 두었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으로 불리게 된다.

이 마을에는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전통한옥 체험관, 안동 장씨 예절관,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유적비 등이 있으며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추앙받는 선생의 얼이 살아있다.

◆'청빈'(淸貧)의 삶이 묻어나는 석계고택

석계 이시명과 안동 장씨 계향 부부는 1640년 두들마을로 입향한다. 이들에게 이 마을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9년 전 이곳에다 터를 잡았다. 1631년 이들 부부는 허허벌판에 초막을 지었다. '청빈'(淸貧)한 삶의 시작이었다. 이후 부친상을 당해 영해로 돌아갔다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이곳으로 들어와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석계 부부는 1640년 살림을 나면서 논과 밭 각 다섯 마지기, 노비 20여 명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석계 선생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에 즐거움이 없다"며 노비들을 돌려보냈다. 그저 논과 밭을 팔아 임진'병자년 양란으로 궁핍해진 사람들을 구빈하는 데 사용했다.

이 때문에 석계고택은 여느 종갓집 같지 않다.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길고 둥근 서까래에 덧얹는 사각의 짧은 서까래인 '부연'(附椽)조차 없다. 지붕 용마루 끝에 세우는 '망와'(望瓦)도 없다. 지붕도 팔작이 아니 맞배지붕이다. 一자형 맞배기와집 사랑채와 5칸 규모의 一자형 안채가 二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여느 양반가옥과 달리 이 집에는 곳간채가 없고, 토석담장이 둘려 있다.

특이한 것은 언덕 위 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二자형 가옥 옆으로 이중 담장을 설치해 口자형 흉내를 내고 있다. 전통가옥의 간결함과 검소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미완의 건축물'이다. 최고 어른의 집이 이렇듯 두들마을 고택들은 모두가 부연, 망와가 없다. 대부분 맞배기와집이다. 최근 들어 지어진 광산문학연구소가 비로소 부연 서까래와 망와를 얹어 이 마을의 첫 완성 건축물이 됐다.

◆'구빈'(求貧) 위한 참나무, 수백 년 마을 버팀목으로

두들마을 언덕 위에는 아름드리 참나무(도토리나무)가 여럿 있다. 석계 선생 부부가 1631년 이곳에다 터를 잡으면서 심었던 나무들이다. 3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꿋꿋하게 버티고 선 나무가 50여 그루에 이른다.

석계 선생과 정부인 안동 장씨는 두들마을에 들어오면서 언덕 위에 참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궁핍해진 사람들의 가난한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변변하지 못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석계 선생과 아들 4남의 경학이 소문나면서 이들의 초막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접빈객'(接賓客)들에게 도토리로 끓인 죽으로 예를 다했다. 도토리로 궁핍한 인근 수백여 명을 구휼했다.

석계 선생의 13대 종손인 이돈(75) 씨는 "석계 할배와 정부인 안동 장씨 할매는 자식들에게 글 잘하는 것보다 착하게 자라는 것을 바랐다"며 "할매는 물욕으로 의리를 해칠까 봐 걱정했으며 언제나 자식들에게 '의리는 소중하고 무거우며 물욕은 가벼워 걱정'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이 마을 앞 언덕에는 '낙기대'(樂飢臺), '세심대'(洗心臺)가 새겨져 있다. 부족함 속에서도 편안함을 추구했던 선생의 뜻과 교훈을 이어가는 듯하다. '배고픔을 즐기라'는 낙기대는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을 위해 구휼식량을 배급하던 곳이다. 장씨 부인 시절부터 비롯돼 광복 이전까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 계속되었다 한다.

지금도 언덕 위에 세월만큼 많은 가지를 뻗치고 있는 아름드리 참나무에는 석계 선생과 정부인 안동 장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교훈이 그대로 전해온다.

◆여중 군자 장계향과 음식디미방

장계향 선생은 진정한 현모양처였다. 한 집안의 며느리로, 혼탁한 정치로 실의에 빠진 남편을 슬기롭게 내조해 다시 일으켜 세운 지혜로운 아내였다. 게다가 자신이 낳은 6남 2녀를 비롯해 10남매에게는 어진 어머니, 바른 어머니였다.

장계향 선생의 부친은 경당 장흥효다. 장흥효는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로 연결되는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았고, 서애 류성룡과 한강 정구에게 수학한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부친의 영향으로 장 선생 역시 시'서'화에 능했다. 장 선생은 불과 12살의 나이에 유가의 몸가짐과 성리학에 대한 열정 등을 적은 '경심음' '성인음' '소소음' 등 3편의 시를 창작했다. 말년에는 여성과 자녀의 몸가짐, 부모에 대한 공경, 이웃 사랑 등을 담은 시도 적었다.

장 선생은 19살 때 석계의 계실(繼室'둘째 부인)이 됐다. 장 선생은 전실인 김씨 부인의 자녀를 포함해 7남 3녀를 훌륭히 키워냈다. 일곱 아들을 '7현자'로 불리게 했으며 남편과 네 아들, 두 명의 손자가 나라의 부름을 받은 '7산림'으로 불리도록 했다.

장 선생은 한국 전통음식의 보고(寶庫)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했다. 음식디미방은 지금으로부터 약 340년전에 쓰인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이다. 딸들을 위해 지은 조리서인 것이다.

국수와 만두를 비롯한 면병류, 어육류, 소과류, 주류 등의 조리법과 저장'발효'보관법 등에 이르기까지 146가지를 소개했다. 영양군은 이 조리법들을 연구한 음식을 재현해 음식디미방보존회를 중심으로 전통음식 제대로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특히 지역의 청정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바탕으로 '음식디미방'을 세계적인 한국의 명품 음식으로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13대 종부인 조귀분(66) 음식디미방보존회장은 "장계향 선생은 한문 실력이 뛰어났지만 후세들이 가까이 두고 쉽게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음식디미방을 한글로 적으셨을 것"이라며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안동 장씨 예절관에는 해마다 할머니의 교육과 맛을 배우고 체험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영양'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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