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2년, 한 건물에서만 일한 판사님…이기광 대구고법 수석부장판사

대법관 후보로 거론 영광, 지역민 조정·화해 잘 안돼

장애인으로 대구법원 한 건물에서 20년 이상 근무하고 있는 이기광 대구고법 수석부장판사는 지금 있는 자리가 가장 중요하고, 일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정운철기자
장애인으로 대구법원 한 건물에서 20년 이상 근무하고 있는 이기광 대구고법 수석부장판사는 지금 있는 자리가 가장 중요하고, 일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정운철기자

이기광(57) 대구고법 수석부장판사는 22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지역은 물론 대구법원을 떠나본 적이 없다. 1990년 3월 대구지법 형사항소부 배석 판사로 대구에서 법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줄곧 한 건물에서 근무해왔다. 이 부장판사는 20년 이상 대구지'고법에서 근무해 '대구법원의 지킴이' '지역 법관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1986년 3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판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 수석부장판사는 1990년 대구로 온 뒤 소액'형사'민사'가사단독을 맡은 뒤 1996년 대구고법 배석판사, 2001년 대구지법 부장판사, 2008년 대구고법 부장판사를 거쳐 올 2월 차관급인 대구고법 수석부장판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아무리 특정지역의 향판이라도 인근 도시의 지원에 한두 번 정도는 나가는 게 보통인데 20년 넘게 한 건물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며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몸이 불편해서 배려해 준 덕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상대가 누구라도 앉아서 손님을 맞는다. 대구고 2학년 때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군위에서 대구로 유학 와 고종 형님 집에서 함께 살면서 학교에 다닐 때 해충약을 친 쌀로 밥을 지어먹은 뒤 그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당시 6월 말쯤 배달받은 쌀에 벌레가 생겨 이를 없애려고 쌀자루에 약을 넣었는데 이 쌀로 두 달 이상 밥을 지어먹었다가 중독돼 서서히 발목부터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마비된 손은 나중에 풀렸지만 두 다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쌀 때문이란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도 이 수석부장판사는 감사하고 있다. 당시에는 인생의 큰 짐이 될 것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했고 곧 나을 것이라 믿어 크게 실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지체장애인이 되면서 이과와 법대 사이에서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던 진로를 법대로 굳히는 계기가 돼 현재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 젊은 시절 큰 아픔을 겪은 이 수석부장판사는 친구들보다 몇 년 늦게 1981년 영남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3년 25회 사법시험에 합격, 마침내 법관의 꿈을 이뤄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대구에서 오래 법관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대구지역민들은 '명분'을 중시해 다른 곳에 비해 조정'화해가 잘 안 된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소신 있는 판결을 하는 법관,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판사로 평가받고 있는 이 수석부장판사는 최근 대구변호사회로부터 대법관 후보로 천거되기도 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지역에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 많아 대법관은 기대도 안 하지만 후보로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감사한다"며 "지금 있는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흠결없는 판결을 할 수 있는 법관이 되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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