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무거운 약속

중국 춘추시대 유학자인 증자(曾子)의 이야기다.

하루는 그의 부인이 장을 보려고 나섰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가겠다고 울며 떼를 썼다. 엄마는 아이를 달랠 요량으로 "시장에 다녀온 뒤 돼지를 잡아 맛있는 반찬을 해줄 테니 집에서 놀아라"고 했다. 아들은 울음을 뚝 그쳤다. 증자는 옆에서 묵묵히 부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얼마 후 부인이 장을 봐 집으로 돌아오니, 증자가 마당에서 돼지를 잡으려고 했다. 당시 돼지는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놀란 부인은 돼지를 왜 잡느냐고 다그쳤고, 증자는 "당신이 아이에게 돼지를 잡아 반찬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으니 잡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인은 펄쩍 뛰며 "아이를 달래려고 그냥 해본 소리"라며 말렸다.

그러자, 증자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되오. 아이는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 배우는 법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가 뭘 배우겠소"라며 기어코 돼지를 잡았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 후보는 지난달 대구시 동구 안일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꿈'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했다. 박 후보가 이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학생 동기부여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자청해서 이뤄진 일정이었다. 박 후보 측은 학생들과 '꿈의 대화'를 나눈 뒤 대구에서 교육정책 공약을 발표할 것이라고 방문 이틀 전부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리고 다음날, 초교 방문을 포함한 대구 일정을 모두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서울에서 중요한 의원총회가 있는데, 현장에 가서 정책을 발표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일정을 잠정 연기한 것"이라는 게 박 후보 측의 설명이었다.

물론 새누리당 당원들은 정두언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돼 당에 대한 비판여론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박 후보가 일개(?) 초등학생들을 만나러 갈 게 아니라 의총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박 후보의 정치적 판단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곱씹게 된다. 학생들은 박 후보의 방문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뒤 "엄마, 아빠. 우리 지역 출신 여자 대통령 후보가 우리 학교에 온대" "우리와 함께 직접 '꿈의 대화'를 나눈대"라고 들떠 하며 자랑했을 터이다.

박 후보의 갑작스런 방문 취소 소식을 알게 된 아이들은 과연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큰일을 하는 어른들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겼겠지'라고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구나' '어른들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인식을 갖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럽다. 약속을 쉽게 저버린 데 대해 자칫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박 후보 측은 대구 방문 취소를 발표하면서 해당 학교, 특히 학생들에게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박 후보는 방문 취소 5일 뒤 결국 대구를 찾았지만 '일방적인 약속 파기'에 대한 아이들의 실망감을 얼마나 희석시켰을지, 어떤 꿈을 심어줬을지, 또 그런 상황 속에서 발표한 교육 공약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의문스럽다.

박 후보가 대구 안일초교 방문을 결정한 날,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쇄신 국회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직을 사퇴한다"고 말했다. 이틀 뒤 열린 의원총회 후에도 "의총 결론과 관계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무조건 사퇴한다"고 재차 밝혔다. 하지만 그는 3일 뒤인 16일 사퇴를 번복하고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서 "약속을 지키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가운데 한때 박 후보의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던 유승민 국회의원의 정치적 행보가 새삼 관심을 끈다. 그가 대구 K2 공군기지를 옮기겠다는 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05년 10'26 재선거 이후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7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국회 국방위원회만 고집해왔고, 19대에서는 내부 견제에도 불구하고 국방위원장 경선에 나서 압승을 거뒀다. 군비행장 이전 국회의원모임 대표도 맡아 '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박 후보나 이 의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대통령 경선 후보나 국민을 상대로 한 공언을 쉽게 번복하는 여당 원내대표의 모습에서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어떻게 쌓여왔는지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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