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농촌계몽? 그건 옛말…"이젠 재능나눔 시대"

대학생들이 마을회관 옥상에 모여
대학생들이 마을회관 옥상에 모여 "안녕하세요. 경북대황토농활대입니다"라며 큰 소리로 마을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우태욱기자
농활 온 대학생들이 오전 농사일 후 마을회관 앞 수돗가에서 시원하게 등목을 하고 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농활 온 대학생들이 오전 농사일 후 마을회관 앞 수돗가에서 시원하게 등목을 하고 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대학생들이 주민 성승기 씨의 포도밭에서 포도나무 밑에 비닐을 까는 등 작업을 하고 있다. 우태욱기자
대학생들이 주민 성승기 씨의 포도밭에서 포도나무 밑에 비닐을 까는 등 작업을 하고 있다. 우태욱기자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황토농활대 식단, 규율, 역할 분배표. 황희진기자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황토농활대 식단, 규율, 역할 분배표. 황희진기자

"20여 년 전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무렵이었어요. 한 선배가 시골로 엠티를 가자고 했습니다. 교복을 벗고 성인이 됐다며 한창 놀러다니기 좋아하는 새내기 여대생이었던 저는 덜컥 선배들을 따라갔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한 산골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엠티 가면 늘 하던 야유회는 하지 않고, 느닷없이 밭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난생처음 몸뻬 바지 입고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았어요. 엠티가 아니라 말로만 듣던 '농활'을 간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뒤 집에 돌아갔더니 아빠가 '우리 딸은 어디 가고 아프리카 사람이 왔네' 하며 놀리시더라고요. 까맣게 탄 얼굴을 그제야 거울로 확인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납니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도 농활을 하러 가나요?"(주부 박선영 씨'45'대구 동구 효목동)

네, 갑니다. 그때처럼 대학 선배들이 새내기 후배들을 꾀어 데려가는 것은 물론 몸뻬 바지 입고 호미 들고 잡초 뽑는 일도 똑같아요. 주전자 가득 막걸리에 시골 아지매들 푸짐한 새참 인심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은 단순히 농사일만 돕는 것이 아니라 벽화를 그려주고, 컴퓨터도 가르쳐주는 등 일종의 '재능 나눔'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활이 점점 멀어지는 도시와 시골, 그리고 젊은이와 어른 세대 간에 '이해'하고 '교감'하는 계기를 선물해준다는 거죠. 농활을 통해 우리 젊은이들은 한 뼘 더 성장한답니다.

◆대학생 농활대가 떴다

지난달 29일 정오 경북 영주시 이산면 석포1리. 한적한 마을에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들이닥치더니 맨 먼저 마을회관 옥상을 점거했다. 점령군이 된 것처럼 깃발을 꽂고, 플래카드를 펼쳐 건물 앞에 걸었다.

"안녕하세요. 경북대 황토농활대입니다." 이들은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생들. 이날부터 이달 4일까지 6박 7일간 마을회관을 숙소 삼아 머무르며 농활을 한다고 했다.

짐을 푼 대학생들은 각자 역할을 정했다. 집에서는 평소 손도 대지 않던 식사 준비, 청소, 설거지 등 역할을 나눴다. 기상 담당도 있었다. 말 그대로 아침마다 동료들을 책임지고 깨우는 알람시계 역할을 한다. 벌레 박멸 담당도 있었다. 살충제를 항시 휴대하며 매일 밤 모기향을 설치한다.

농활을 하는 동안 딱딱하지 않은 나름대로의 규율도 정했다. 일과 중 기대거나 눕지 말자는 규율이 있었다. 단, 서로의 등에 기댈 수는 있다. 고된 노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우쳐보자는 취지란다.

농활대의 하루 시간표는 이랬다. 오전 5시에 기상해 아침을 먹는다.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농사일을 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까지 휴식을 취한다. 다시 오후 7시까지 농사일을 하고는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다 하루를 정리하는 '총화'를 하고는 잠자리에 든다. 최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농촌에서 햇볕이 뜨겁지 않은 아침과 저녁에 일을 나눠 하는 것에 맞췄다. 대신 시간이 비는 낮에 주민들을 찾아가 이런저런 교류 활동을 펼친단다.

이날 오후 2시쯤 첫 농사일을 함께할 주민 성승기(59) 씨가 마을회관을 찾았다. 매년 농활 오는 대학생들을 돕고 있다는 그는 "대학생들이 농활을 하러 오는 횟수와 규모 모두 점점 줄고 있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에는 대학생 100여 명이 오기도 했어요. 당시 마을회관 건물도 없어서 대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습니다. 잠과 밥은 해결됐는데 문제는 씻는 거였죠. 그래서 마을에서 양수기를 구해 호스를 연결하고는 '샤워기'라며 사용했습니다. 수압이 굉장해 인기 만점이었죠."

◆농사일은 힘들어

첫 농사일을 나가기 전 대학생들은 채비를 차렸다. 늘 야구모자 등 패션 모자만 쓰던 대학생들은 농활 분위기를 내는 것은 물론 햇빛을 가려주고 머리도 식혀주는 밀짚모자를 썼다. 작업용 팔 토시는 시원한 '쿨링' 기능이 있는 것으로 장만했다.

모두 성승기 씨의 1t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5분여를 달려 절반은 포도밭으로, 나머지는 수박밭에 내렸다. 포도밭 조는 포도나무 밑에 비닐을 까는 작업을 했다. 비가 많이 오면 포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 비닐이 완충 작용을 해 포도가 터지지 않는단다. 대학생 백경탁(21) 씨는 "비닐 까는 일이 힘은 별로 들지 않지만 협동심이 중요한 것 같다"며 "요즘 대학생들은 스펙 쌓기 등 경쟁을 하며 개인 위주로만 움직이고 생각하는데 농사일은 절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수박밭 조는 수확을 한 후 남은 자재를 치우고, 너무 익어 팔지 못하는 수박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상(上)품 등급은 능히 받을 수박 몇 개를 잘못 골라내기도 했다. 결국 그날 새참으로 먹었다.

곧잘 허리를 펴 두드리던 대학생 유형택(21) 씨는 "농사일은 단순히 일이 힘들기보다는 똑같은 작업을 묵묵히 반복해야 해 고단한 것 같다"며 "그러면서 '도'(道)가 깃들기 때문에 우리 농산물이 영양도 풍부하고 몸에도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성승기 씨는 "'땅'과 '땀'이 어우러져야 결실을 맺는 것이 바로 우리 농산물"이라며 "나는 보릿고개를 거치며 먹거리의 소중함을 겪어 본 세대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대신 농활을 통해 먹거리의 소중함을 느끼면 좋겠다"고 말했다.

◆농활=젊은이들의 농촌 알기 활동

석포1리는 선성 김 씨가 많이 모여 사는 집성촌에 가깝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할머니 20여 명도 대부분 서로 동서, 형님이라 부르는 사이다. 대학생들의 숙소인 마을회관은 사실 할머니들의 아지트였다. 평소 모여 음식을 해 먹고, 치매 방지에 좋다는 점당 10원짜리 고스톱도 즐기던 할머니들이 대학생들에게 숙소로 쓰라며 기꺼이 자리를 내준 것.

"불볕더위가 지속되면 특히 논보다 밭이 가물어서 고민입니다. 노인들은 한낮에는 밭에 나갈 엄두도 못 내고, 대신 아침과 저녁에 일을 하지만 버겁죠. 얼마 전 경북 칠곡에서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80대 노부부가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면서요?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노년층 위주의 농촌 실정에 이렇게 젊은이들이 와서 일을 거들어주니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요즘 농활은 농사일만 돕지 않는다. 농촌 어르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친해지기 힘든 것이 바로 컴퓨터다. 대학생들은 하루 날을 잡아 작목반의 밀린 1년치 전산 및 워드 작업을 해주고, 다시는 일이 밀리지 않도록 주민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IT 강좌도 열었다.

농활의 하이라이트는 대학생들이 주민들을 초대하는 마을잔치. 대학생들은 수육이며 부침개 등 조촐한 먹거리를 대접했다. 막걸리와 함께 마을잔치의 흥을 돋운 것은 트로트부터 최신 아이돌 가요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었다. 대학생들은 '트로트가 이렇게 신명나는 노래구나'하고 느꼈고, 어르신들은 손자'손녀들이 오면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는지 아는 척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런저런 장점이 있지만 농활의 핵심은 대학생들이 농촌의 현실을 깊숙이 아는 것이다. 대학생 최태양(24) 씨는 "농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민할 거리가 늘 있는 곳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시대가 변해도 농활이 계속 이뤄져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물론 이렇게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농활은 나중에 되돌아보면 절로 웃음을 머금게 해 줄 젊은 날의 추억이기도 하다. 대학생 최혜정(21'여) 씨는 "새내기 때 농활을 처음 경험한 뒤 푹 빠져 2년째인 올해는 농활대를 이끄는 대표인 '농활대장'으로 참가했다"며 "순간순간이 나중에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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