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읽을까요?" 들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옛날엔 곧잘 권장하기도 했건만, 그러길 그친 지도 꽤 오래다. 읽고 난 뒤 반응이 갈수록 신통찮았기 때문이다. 독서의 감흥은 책과 독자가 잘 엮일 때 비로소 샘솟는다. 자신의 관심과 고민이 책의 내용과 맥이 닿고, 그 과정에서 해결은 아니라도 자기 문제에 이해의 눈을 열어줄 때 마음은 호소력에 젖는다. 아무리 좋은 책도 공감할 수 있는 내적 준비가 없으면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학생들과는 세대 차가 벌어져서 그들의 고민거리에 낯설게 되고, 친구들과는 각기 다른 일과 생활로 공통의 관심사가 줄어드니 책 추천이 당혹스러운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책 읽기가 사양화되는 사회적 기류다. 생활을 들여다보자. 버스나 전철을 타면 손에 책을 든 사람은 '멸종 위기'임을 알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MP3, 태블릿PC 등이 책을 대신한 지 오래다. 학교나 도서관을 가면 모두 책을 펴고 공부를 하지만, 대부분 책은 수험서다. 직장에선 여유가 없지만, 그래도 읽히고 있는 것이 있다면 대체로 자기계발서다. 책은 책이지만, 독서라고 하기엔 어쭙잖다. 학교와 일터에서 집으로 오면, 인터넷게임과 TV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각종 조사가 위의 관찰을 입증한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독서율을 감소시켰다고 한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단연 판매량 1위(24.7%)는 학습지다. 토익과 같은 외국어 서적(5.5%)을 포함하면, 30%가 넘는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 자기계발서와 처세서가 급부상한 이래 여전히 위세를 높여 가고 있다. 인터넷 사용과 TV 시청 시간은 독서 시간과 반비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시험 준비와 돈벌이에 내몰리다 여유를 찾으면 놀 거리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우리의 생활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어렵게 하고, 따라서 독서의 감흥을 경험하기는 힘들어진다. 골칫거리는 난무하지만 정작 고민거리를 품지 못하는 세태는 독서의 척박한 토양이다.
그런 가운데 흥미로운 두 사실이 주목을 끈다. 먼저 나이가 들수록 책을 적게 읽는다. 초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고(연간 29.5권) 중'고등학교로 갈수록 독서량은 감소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폭락해서 10권에 못 미친다. 둘째, 독서율의 전반적 하락세에도 읽는 사람은 더 읽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책의 권수와 독서 시간 그리고 도서 구입비 모두에 걸쳐서 '양극화 현상'이 뚜렷한 추세다.
독서를 못 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이 '일, 공부 때문에 바빠서'라고 한다. 이는 연령과 독서량의 반비례 관계를 설명해준다. 상급학교에 갈수록 공부량이 많아지고, 나이가 들수록 먹고살기 바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공부와 일이 독서와 소원해지는 것은 염려스럽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뭔지를 '외우면 합격'하고 '읽으면 떨어진다'는 입시 제도의 문제점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정보사회에서 독서량의 감소가 생산력과 경쟁력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지도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독서의 양극화 현상이다. 청소년들의 경우, 부모와 대화 시간이 적을수록 그리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인터넷게임에 더 매달리고 책 읽기는 줄어든다고 조사됐다. 대화 시간과 자존감의 부족이 저소득층에서 두드러짐을 고려하면 빈곤의 대물림을 조심스럽게 내다볼 수 있다. 시장지상주의가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이는 다시 책 읽기를 양극화하여 계층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면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막혀버리고 만다.
이처럼 독서는 사회의 여러 변화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런 변화를 매개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초, 2012년을 '독서의 해'로 선포하고 독서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어떤 실천을 했는지 궁금하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사실 책 읽을 기회는 방학과 휴가철에 많다. 그리고 연말연시의 분주한 겨울보다는 여름이 더 낫다. 뙤약볕에 피서한다고 사서 고생할 게 아니라, 책 한 권 정해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것이 현명한 더위 나기일 성싶다. 이렇게 더위를 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사회는 또 다른 폭염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재정/대구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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