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는 뉘른베르크(전범) 재판이 열렸고, 아시아에서는 도쿄(전범) 재판이 열렸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전쟁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점령 지역을 탄압한 독일의 비밀경찰 역시 피고의 범주에 포함됐지만, 한반도에서 장기간 범죄를 저질렀던 일본의 특수기관은 도쿄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위안부나 강제 징용, 자원과 식량 약탈 등이 그런 예다.
2차 세계대전은 크게 2개 지역에서 벌어졌다. 유럽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이 독일과 그 동맹국을 상대로 싸웠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미국과 중국이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유럽에서는 전쟁 책임이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분할되었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아니라 식민지였던 한국이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일본의 A급 전범은 모두 25명이었다. 이들 중 4명이 총리를 역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장관, 장성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점령 정책을 원활히 수행하려는 미군 점령 당국과 천황제를 지키려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B'C급 전범에는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던 군인이나 민간인 군속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인이었다. 재판 결과 A급 전범보다 훨씬 많은 B'C급 전범이 처형되었다. 이런 처벌의 배경에는 독일이나 이탈리아군에 잡힌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4%)에 비해, 일본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27%)이 월등히 높았다는 점이 작용했다.
미국은 일본의 포로수용소 가혹 행위를 엄격히 처벌했지만, 일본의 식민지 가혹 행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위안부, 징용자, 친일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은 미국이 당시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않고 덮어버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리 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의 식민 피해를 청산해 줄 의무는 없었다.
한국은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일본이 아시아 식민지 확대를 위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지는 바람에 해방되었다. 당연한 결과로 우리는 도쿄 재판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35년 동안 두들겨 맞고, 사람과 물자를 빼앗겼다. 해방된 뒤에는 남북이 분할되어 전쟁을 치렀고, 위안부와 징용자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이것이 미국 탓인가?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탓인가? 힘없는 국가는 선처를 기대할 뿐 요구할 수 없음을 역사는 일관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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