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느리게 읽기] 수백 년 전 그림을 마음으로 만나는 순간…

그림과 그림자/김혜리 지음/앨리스 펴냄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는 뜻도 잘 알지 못하는 미술 사조를 외우는 것이 필수였다. 미술 사조에 포함된 작가 이름을 외우는 것은 당연지사. 수백 년 전 그림 그리며 살았던 그 사람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람.

요즘의 현대미술은 괜한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변기를 전시한 것이 현대미술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고, 점 하나를 찍어놓은 작품이 수억 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래저래 미술은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수십, 수백 년 전 그려진 그림이 문득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림을 만나는 순간이다.

사각의 캔버스 위, 작가는 영혼을 다해 그 사각의 면 위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것이 벽에 걸리면, 우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이 책은 한때 예술중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던, 그래서 결국 자질 없음을 확인했지만 그림을 사랑하게 된 저자가 만든 '상상의 미술관'이다. 여행지를 가면 미술관을 찾아 들어가는 저자에게 그림은 매혹적인 무중력의 공간이다.

저자는 '내 안에 고인 물을 조용히 흔들었던, 때로 신경을 마비시키거나 불붙였던 그림들을 상상 속 화랑의 빈 벽에 하나씩 걸었다'고 고백한다.

'명작'이 주는 무거운 아우라를 벗고, 그림 그 자체로 바라본다. 그러면 그 그림을 그렸던 작가의 삶이 '위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이야기로 들린다.

로런스 라우리의 '공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 라우리는 밤 10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그는 생계를 위해 회사를 다니며 밤마다 어머니가 잠든 다음에야 붓을 들었다. 화가는 '고독하지 않았다면 한 장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고 고백했다. 그는 42년간 임대료 징수원으로 근무하며 꾸준히 작품을 그렸다. 그가 그린 풍경은 잉글랜드 북부 공업도시의 풍경. 평생 일하며 노동의 의미를 아는 작가는 마치 뤼미에르 형제 초기 영화의 정지 화면 같다.

강과 어스름을 사랑한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을 즐겨 그렸다. 화가는 말한다. '빛이 사위고 그림자가 깊어지면 사소한 디테일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이 퇴장한다. 사물은 위대하고 강력한 덩어리로 보인다. 단추는 보이지 않지만 옷은 남는다. 옷은 보이지 않지만 모델이 남는다. 모델도 보이지 않게 되면 그림자가, 그림자조차 사라지면 마침내 그림이 남는다.'

그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저자가 만든 자신만의 미술관에 초대된 기분이다. 물론 마음속의 미술관이니 수십, 수백억짜리 미술 작품을 요리조리 마음껏 뜯어볼 수 있다.

그림이 미술관에서 걸어 나와 말을 건다. 작가의 영혼과 소통하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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