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향토음식이라고 하면 흑돼지와 말고기, 밀감 그리고 해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전복과 성게 등을 재료로 한 음식을 떠올린다. 모두 오래전 관광 상품화가 이뤄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음식들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주도 사람들만이 즐기는 전통 제주도 토속음식으로 '몸국'이라는 게 있다. 잔치상과 명절음식으로 빠지지 않는 이 음식은 빙떡과 함께 제주사람들이면 언제나 그리워하는 향수짙은 고향 음식이다. 최근 국내 미식가들 사이에 이 음식에 웰빙성이 부각되면서 산업화가 가능한 또 하나의 제주 향토음식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제주도 특산 '몸국'을 아시나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마을은 섬 한가운데 위치한다. 때문에 승용차로 섬 동서남북 어디서든지 30~40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곳. 한라산기슭에 자리해 평균 고도가 해발 300m 정도로 고지대다. 제주도 속 강원도라 불리울 만치 자연이 옛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덕면내 동광리'산천리'광평리 등 3개 마을은 그래서 개울물을 그냥 떠 마셔도 될만큼 최고의 수질을 자랑한다. 얼마전까지 누에를 많이 쳐서 양잠단지로 널리 알려진 이 마을은 제주도 토박이들만 모여 농사를 짓고 산다. 이 마을 주민들로부터 관광 음식으로 뒷전으로 밀려나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제주 향토음식 몸국과 빙떡의 원형을 찾을 수가 있었다.
"제주 몸국이랭 헌거 알아지쿠광?"
안덕면 내 노인회장인 이승민(75'동광리 5-94) 할아버지. 본지 맛탐방단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할아버지는 먼저 '몸국 이름을 들어나 봤냐'고 제주 사투리로 말을 건넨다. 박영애(66) 할머니가 전날부터 몸국을 준비하느라 제주 흑돼지고기를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가며 고아내고 있었다.
해초 모자반을 제주에서는 '몸' 또는 '멀망'이라고도 한다. 가마솥에다 돼지고기를 뼈와 내장까지 넣고 6시간 이상 푹 고아낸 국물에 모자반을 넣고 메밀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끓이는 몸국은 독특한 맛이 우러나는데, 혼례와 상례 등 제주사람들의 크고 작은 집안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만들었던 잔치 전용 제주 향토음식. 전형적인 우리네 슬로우 푸드다.
"아이구 혼자 옵서예(아이구 어서 오세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일행을 반기는 박 할머니는 앉자마자 곧장 몸국 얘기를 펼쳐낸다.
"돼지고기와 뼈는 물론이고 내장과 수애(순대)까지 다 넣고 삶아요."
고기를 건져내 따로 쓰고 나서 뼈와 내장은 더 고아서 국물을 만든다. 뼈가 저절로 으스러질 정도로 가마솥에 고아내야 한다. 펄펄 끓는 국물에 먼저 푸른 배춧잎을 넣고 난 뒤 몸, 즉 모자반을 넣고 한소끔 더 끓여내면 진한 고기 국물과 담백한 해초 모자반이 어우러져 입에 착착 달라붙는 새로운 맛의 몸국이 완성된다. 제주사람들은 이 맛을 "배지근하다"고 표현한다. 국물이 너무 맑을 경우 메밀가루를 풀어서 약간 걸쭉하게 만든다.
"몸은 생 몸이나 마른 몸 물에 잘 불려서 소금기를 뺀 뒤 재료로 써야 해요. 소금기가 빠지지 않으면 국물에서 쓴맛이 나거든요."
제주도에서 몸국이 가지는 의미는 나눔의 문화에 있다. 제주에서는 아직도 혼례나 상례 등 집안의 행사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십시일반으로 거드는 두레 풍속이 있다. 이런 행사에서는 주로 기르던 흑돼지를 잡았는데, 생선이나 어패류 이외의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하기 힘들었던 제주 사람들이 귀한 돼지고기를 온 마을사람들이 알뜰하게 나눠먹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양이 풍부해지는 몸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소금만으로도 간이 되는 구나!
한라산기슭에서 사는 사람들은 해녀들이 일하는 해변 마을과는 환경이 다르다. 강원도 고랭지처럼 산기슭 비탈밭에는 채소를 많이 재배했다. 그리고 강원도 화전민들처럼 메밀을 갈았고 집집마다 서너 마리씩 흑돼지를 길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재료를 돼지고기로 해 메밀과 채소를 곁들이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모자반으로 국을 끓인 것이다.
"옛날에는 몸이 바닷가에 가면 누구나 한 소쿠리씩 그냥 주워 올 수 있을 만치 흔했어요."
박 할머니가 갓 시집올 적만 해도 얼마든지 주워 올 수 있었던 게 몸인데, 요새는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다시피 하면서 귀해졌단다. 서민들의 음식이 몸국인데, 이제는 명절이나 잔치가 없으면 평소에는 쉽사리 접할 기회가 없다고 한다.
"구수한 맛에다 소화도 잘 되어서 그런지 손자들이 오면 날 보자마자 '할머니 몸국 주세요. 몸국 주세요'해요."
바다에서 나는 해초국이어서 요즘 아이들도 싫어하는 이가 없단다. 몸국은 특히 향신료나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는 게 특징. 마늘 양파 된장 간장 등 양념도 쓰지 않는다. 그냥 식성에 따라 곁들여 얼큰하게 먹으라고 잘게 썬 청양고추나 쪽파를 썬 그대로 접시에 낼 뿐이다. 육지에선 돼지고기 냄새를 제거한다고 된장 물에 삶기도 하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맛있는 음식이 되니 신기하다.
"몸도 좀 거친 게 있고 부드러운 게 있는 데, 가파도와 비양도 몸이 가장 좋지요."
좋은 토질에서 부드러운 채소가 자라듯 몸도 바다에 따라 품질이 다르단다. 그래서 가파도와 비양도 몸은 생으로 먹어도 삶은 미역처럼 아주 부드럽다고. 녹조류인 몸은 단백질과 칼슘, 철분, 요오드 및 비타민A'B, 알긴산 등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추 국이 다 될 즈음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서 끓는 국에 넣는다.
"메밀은 품에 품었다가 먹어도 될 정도로 불기운을 조금만 쐬면 익는다"면서 눋지않게 서둘러 주걱으로 저어준다. 메밀을 넣게 되면 이제 상에 국을 올리는 차례다. 배추잎으로 돼지고기 냄새를 없앴다. 돼지고기 육수를 두고 육지 배추와 바다 몸이 만난 것. 맛깔스런 녹색과 갈색의 앙상블이다. "아 소금만으로 간을 해도 음식이 되는구나!"
한 숟가락씩 입에 떠 넣으면서 다들 하는 말이다. 돼지 추어탕이라고 해야 할까. 웰빙 돼지고기 해초국. 해초 모자반 특유의 부드럽고 미끈한 식감이 처음인데도 이전에 먹어본 듯 왠지 입안에 익숙하다. 청양고추와 쪽파가 뒷맛을 개운하게 이끈다. 투박해 보이지만 입안 전체가 느끼는 맛은 풍만하다.
"안뜨거웁과?"
연신 숟가락질에 걱정스런 박 할머니가 뜨겁지 않냐고 묻는다. 마음까지도 다 넉넉해지는 몸국이다.
◆우리 음식의 맛 원형을 찾았다
몸국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제주 향토음식이 빙떡. 메밀가루를 물에 개어서 유채기름으로 번철에 얇게 부친다. 번철은 은은한 불에 달군다. 유채기름이 없으면 참기름을 두르고 굽기도 한단다. 잘게 썬 쪽파와 채선 무를 소금간을 해서 짭짤하게 볶아 둔 무소를 미리 만들어 둔다. 간단하게 메밀전으로 무소를 전병처럼 싸면 바로 빙떡이 된다.
"제주지방 제사상에는 필수지요. 잘살고 못살고 구분 없이 빠질 수 없는 명절음식이기도 하고요."
박 할머니는 가지 꼭지로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서 국자를 이용해 둥글게 메밀전을 척척 구워낸다. 명절 때 손자들이 둘러 않으면 지저내기 바쁘다고 한다. 빙떡은 옥돔구이나 갈칫국과 궁합이 맞다면서 옥돔이 있었으면 숯불에 맛있게 구워서 제맛을 보일텐데 라며 내내 아쉬워했다.
한 입 베어무니 맛이 야채만두 같다. 아주 단백하다. 기름은 겨우 냄새만 날 정도로 적게 써서 느끼하지 않다. 메밀전과 볶은 무가 거의 환상적이다. 소금만으로 어떻게 이런 맛을 연출할 수 있을까. 약간 팍팍한 느낌의 메밀전에다 물기를 듬뿍 머금은 부드러운 무. 가장 흔한 음식재료로 최고의 식감을 냈다. 몸국에서도 빙떡에서도 제주도 어멍(어머니)들의 슬기가 느껴진다.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지요."
박 할머니는 부치고 있는 번철 바로 곁에 앉아서 얻어먹어야 제맛이라고 하며 연신 권한다.
또 하나의 토속음식인 호박갈칫국도 일체 양념이나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 제주도 은갈치와 토종 늙은호박이 주재료다. 연중 음식인 갈칫국은 애호박도 좋은데 늙은 호박이라야 제맛이 난단다. 끓는 물에 납작 썰기한 호박을 먼저 넣고 삶다가 갈치를 토막쳐서 넣는다. 한소끔 끓여내면 간수가 빠진 3년 묵은 왕소금으로만 간을 맞춘다.
"소금으로 간을 해야만 갈치에서 나오는 감칠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지요."
주황색 호박과 갈치의 은백색이 아주 조화롭다. 식욕을 당기게 하는 색감이다. '어두육미'라고 갈치 머리는 꼭 들어가야 한단다. 쓸개만 떼어내고 내장'꼬리'머리 등 통째로 간다. 호박갈칫국엔 보리밥이 제격이라고.
희한하게도 소금만 넣고 끓였는데도 국물에 감칠맛이 우러나 있다. 갓 잡아 올린 듯 갈치 특유의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고춧가루 범벅을 하는 육지의 갈치조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호박 맛과 어우러져 의외로 담백하다. 갈치의 비린내를 줄이려 하지 않고 독특한 맛으로 살려낸 게 특징이다. 제주도식이다. 생선 음식에 마늘 한 쪽도 쓰지 않는 희한한 조리기법. 파격적이다. 안동 등 육지의 내륙 산간오지 사람들이 '살짝 물이 간 갈치라야 더 맛있다'고 하는 얘기를 생각나게 한다. 싱싱한 건 싱싱한 대로, 물이 간 것은 물이 간 대로 맛깔스런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제주사람들은 갈칫국에 보리밥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몸국 빙떡 갈칫국…. 조미료가 없던 그 옛날 우리 음식의 맛 원형을 찾아낸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프랜차이즈는 물론 유통 가능성도 높다.
"벌써 감수광?"
다음 일정을 위해 일행이 일어서자 박 할머니는 부랴부랴 빙떡을 싸 준다. 가다가 옥돔구이 집을 보면 들러서 같이 곁들여 다시 맛을 한 번 보라고 하면서. 박 할머니는 그러고도 아쉬운 듯 여러 번 "잘 갑서예"라고 한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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