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포항은 눈을 좀처럼 구경하기 쉽지 않은 지방이다. 며칠 전까지 하얀 성탄절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아이를 달래려는 듯 하얀 눈발이 날려 쌓이기 시작한다. 그 눈발들을 나 홀로 즐긴다. 이 눈발이 친숙하고도 안타깝게 여겨지는 건 아마 눈이 오랜만에 내린 탓이기도 하고 이내 그칠 수도 있다는 아쉬움과 그것의 연약함 때문인 것도 같다. 다행스럽게도, 세모와 새해를 가로지르는 현재의 길 위에서 스스로 손짓해보는 고즈넉한 여유도 가질 수 있는 것에 나대로는 무척 감사하다.
새해를 맞은 지금, 평범한 개인은 개인대로, 사회적 책임이 큰 인물들은 그들 나름으로 한 해를 뒤로하고 새로운 짐을 살펴보아야 할 순간이 된 것 같다. 사정에 따라 시린 계절의 빗장에 손들을 내밀어야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문득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등장했던 꿈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젊은 화가들이 기억나면서, 지금 현실의 도시 한 모퉁이에서 그들처럼 꿈과 싸우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겹쳐져서 떠오른다.
어쩌면 인생이란 희망과 좌절이 엮여가는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중 어느 쪽의 얼굴로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좀 더 성숙해진 발걸음으로 새해를 내딛고자 하는 자세에서 박남수 시인의 시 '안경'에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펴본다.
안경을 쓰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오늘에는
현실이 보이지 않아서, 한평생을
나는 안경을 벗지 못하고 살아왔다.
구부러진 유리알을 통하여
세상의 애환을 살아왔지만, 세상이
그렇게 밝고 어두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나의 상념들이 흐르는 가운데 짙어진 눈발들이 어느덧 아침 도로 위에 가득히 쌓이고 있다.
잠시 가벼운 기도의 자세를 취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그리고 저 하얀 몸짓들이 마치 비록 우리가 혼돈 속에 있을지라도 서로 낯설지 않은 같은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계시만 같다. 기다림처럼, 나는 우리가 긴 문제의 끝에서 답과 만날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아이를 깨우니 창밖을 보며 너무 기뻐한다. 저토록 쌓인 눈밭에서 맘껏 뛰어놀고 오라고 하니 녀석의 두 어깨가 눈발처럼 뛰어논다. 아이처럼, 그리고 박남수 시인의 노래처럼, 나도 저 하얀 빛 속에 마음의 눈을 씻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새해를 맞는 나의 눈도 시력이 맑게 회복되길 기원해본다.
장두현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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