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새벽, 큰 누님이 손녀를 얻으셨다. 특별한 며느리가 낳은 손녀였기에 누님의 기쁨은 더더욱 남달랐다. 대학시절 유달리 해외 봉사활동을 자주 나가던 조카가 독일에 유학 온 러시아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장손인 자형의 반대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누님과 자형은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로 흔쾌히 결혼을 승낙했다.
아마도 자형이나 누나 모두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결혼이 쉽지 않았던 기억 때문에 아들의 결혼을 더욱 축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큰 누님은 집안의 엄청난 결혼반대를 겪어야만 했다. 고등학생인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할 것이라고 믿었고 또 당연히 해야만 할 장녀가 직장까지 버리고 가난한 '화가 나부랭이'와 연애질(?)에 결혼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 할머니는 배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반대를 했다. 그 결과 자형은 문전박대를 당했고 큰 누님은 결국 어머니에게 모진 매까지 맞아야만 했다. 하지만, 누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누님이 중학교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계집애가 무슨 중학교냐"며 매를 들었던 어머니에게 눈물로 빌던 열두 살 계집아이의 애절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매질을 견디고 누님이 야간 중학교와 야간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할머니의 험한 욕설과 어머니의 매질을 이겨내고 누님은 결국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 흔한 결혼반지도, 신혼여행도, 친지조차도 제대로 없는 가난한 결혼이었다.
어쩌면 누님과 자형은 아들의 결혼을 두고서 자신들의 그 슬픈 기억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해서 아들 내외의 결혼식을 축복하려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그 먼 이국의 땅을 환한 웃음으로 날아갔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다시 기차로 8시간을 달려서야 겨우 닿는 사돈집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과 동시에 아들이 직장을 따라 자신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 두 분은 번갈아가며 며느리의 한국말을 위해 하루에 한 시간씩 전화를 거시곤 했다. 대화가 될 리 만무했지만, 시부모의 사랑은 한결같았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며느리는 시집온 지 겨우 6개월 만에 가족들과 웬만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카며느리가 한국에 오던 날, 조카에게 단 한 사람을 보고 그 먼 길을 달려온 아내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일렀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족들 모두는 네 아내의 편이 될 수밖에 없노라고 말했다. 올여름 조카며느리가 친정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시외숙을 위해 벼룩시장을 뒤져 LP 음반 몇 장을 사들고 오는 배려를 보였다.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키가 말년을 보낸 마을에서 자란 그녀가 고른 음반은 어떤 것이었을까? 놀랍게도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아픈 시간을 품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y Shostakovich, 1906~1975) 의 5번 교향곡이었다.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1인 숭배 체제는 3천만 명을 숙청시키는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1936년 당 기관지 로부터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힌 쇼스타코비치가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그 스탈린 압제에 대한 저항과도 같았다. 혁명이라는 부제처럼 4악장의 당당하고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그 어떠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후세의 평가가 있었지만 우습게도 스탈린 체제 하의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의 찬사로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켰다.
새해 첫날, 조심스레 그 음반을 다시 턴테이블에 올린다. 과연 그가 삶을 핑계로 체제의 편에 섰더라면 오늘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제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대선이 끝난 시점,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행보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들이 늘 외치는 변명은 국민이지만 여전히 국민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갓 태어난 손녀딸이 엄마가 이국의 땅에 와서 본 '죽어라 일만 하는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사회'에서 자라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전태흥 미래티앤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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