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아직 개장하지 않은 대구미술관 전시장으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온다. 그 남자는 순식간에 피부로 미술관의 온도와 습도를 판단하고, 눈으로는 전시장 조명을 체크한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조명등 각도 1㎜의 차이, 1럭스의 빛 차이를 느끼고 교정한다. 이 남자 덕분에 대구미술관 관람객들은 다른 건 몰라도 전국 최고 미술관 조명으로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됐다. 이 남자는 최철규 대구미술관 관리소장이다. 28년간 삼성 호암미술관과 호암갤러리, 그리고 리움미술관의 조명을 담당했던 미술관 조명의 최고 실력자다.
미술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대구미술관 전시 작품에 앞서 늘 '조명이 딱 떨어진다'고 감탄한다. 한 미술관계자는 "대구미술관은 벽이 숨을 쉰다"고 표현했을 만큼 항온항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최 소장의 덕분이다.
"미술관 조명은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해요. 상품을 사도록 만드는 상업조명과의 큰 차이점이죠."
미술관 조명은 그냥 '불을 밝히는 것'과는 다르다. 조도에 따라 작품이 돋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술을 다루는 일인 만큼 아주 세심하고 까다롭게 진행돼야 한다. 작품을 무조건 밝힌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할로겐 조명은 열과 자외선, 적외선 등이 많이 방출돼, 자칫 작품을 망칠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시장 내에 조도 차이가 많이 나면 눈이 매우 피로하다. "작품 하나의 특성뿐만 아니라 전시장 분위기, 관람객의 환경 등 다양한 점을 고려해야 해요. 그리고 대형 작품의 경우 작품을 잘라서 조명하되 작품 내에서 조도 1럭스 이상 차이가 나면 안돼, 쉽지 않습니다."
그는 29년간 총 180여 회의 조명을 담당했으니, 전국에서 가장 경험 많은 조명 전문가로 꼽힌다. 오래된 고미술품부터 수백억원대의 명작까지 수많은 작품이 그의 손으로 조명됐다.
특히 그는 국내 최고 미술관으로 알려진 삼성 리움미술관 개관 당시 조명을 담당해 호평을 받았다. 세계적인 건축가의 건물인데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돼 스트레스가 굉장했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국의 국립박물관에서까지 '조명'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미술작품과 전시 내용을 보면 머릿속으로 조명 계획이 스크린처럼 떠오른다. 일단 작품이 전시되면 2,3일 꼬박 조명 작업을 해야 한다. 전시 전날에는 밤을 새는 일은 다반사.
"현대미술작품은 100~150럭스 정도 밝은 조명이 가능하지만 고미술이나 수채화 등은 훨씬 낮아야 해요. 작품마다 조명이 달라지는 거죠. 그래서 현대미술과 고미술작품이 함께 전시되는 작품이 아주 어려워요."
지금도 중요한 전시가 열리면 그에게 조명을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온다. 국내 전시는 물론이고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만의 박물관 조명도 담당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 미술관과 박물관은 조명의 중요성을 잘 몰라 안타깝다. "조명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조도가 밝아지면 이성적 작용이 우세해지는 반면 50~100럭스의 조도가 감성 작용이 가장 활발하거든요. 조명이 이렇게 중요한데 조명에 드는 기본적인 예산마저 깎이면 힘이 빠지죠. 이 정도 미술관에는 조명팀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이곳 뿐만 아니라 전국 국공립미술관 모두 조명 전문가가 따로 없어 아쉬워요."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정년을 대구미술관에서 보내고 있다. 개인 장비인 조도계, 자외선 측정기, 색온도계를 들고 다니며 전시장 구석구석을 누빈다. 아무도 그에게 요구하지 않지만, 국내 최고 전문가인 스스로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다. 요즘 전시장 온도는 18~20도, 습도는 51~54%로 철저히 지킨다. 개관을 함께 한 대구미술관에 대한 애정이 크다.
그의 소속은 대구미술관 민간투자사업자인 현대산업개발그룹 아이서비스. 정년이 끝나면 최고 미술관 조명 권위자인 그는 대구를 떠날 수밖에 없다.
"일류미술관이라면 숙련된 조명전문가가 필수예요. 오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노력하고 배우는 이론과 현장을 겸비한 전문가가 필요하죠. 늦었지만 이런 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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