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이 시대 아버지들의 지갑

어느만큼 나이가 되면 입 대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쉰을 바라보며 지갑을 별스럽게 만지작거리는 때가 잦은 요즘이다. 이번 주말 만혼하는 후배에게 동기들보다 더 보탠 축의금으로 마음을 표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돈이란 형편대로 아껴 쓰는 것이겠지만 남자는 지갑이 비면 안 된다는 말씀도 때로 들으며 자랐다. 이런 옛말처럼 문득 젊은 날 어머님 모습이 회상되면서 용돈을 탄 뒤 대문을 나서는 나의 스무 살 어귀가 함께 삽화처럼 떠오르고 있다.

갓 맞춘 양복 안쪽에 키 큰 가죽지갑을 찔러 넣고 나는 일요일 오전 시내의 동성로 어디쯤을 걷고 있었다. 겨울 햇살만큼 빳빳한 지갑 속 몇 장 지폐들이 첫 데이트 길의 숫기 없는 남자 가슴도 갑옷처럼 펴게 하는 법. 내 기억이 틀리지만 않다면 분명코 그 젊은이는 의젓하게 문을 밀고 찻집으로 들어섰으리라. 그렇지만, 모든 경우에 지갑의 추억이 이처럼 낭만적인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내의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려가던 신혼 시절이 꼭 그랬다.

학위를 마치지 않고 결혼한 첫해, 겨울비 내리는 아침이었다. 선배 시인에게 밤새 얻어먹은 술을 못 이기고, 젖은 콜택시 명함처럼 새신랑 몸이 아침 아파트 현관에 꽂혔다. 그날 저녁 늦게 퇴근하여 거실 턱에 올라선 부산 색시의 상기된 입술엔 불꽃이 붙어 있었다.

"마누라 욕 고마 묵이지예! 신분증 한 장만 든 지갑을 콜택시 기사가 경비실에 맡기고 갔는데, 신랑 용돈 좀 주라고 경비실 아저씨가 막 내 탓을 하네요!"

"……."

그 시절부터 내 빈 지갑에 아내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것이 다 이 사건 덕택이니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삶의 고비마다 실밥이 터지게 되는 지갑 속에도 순간순간 중년을 새신랑 시절로 되돌려 온 태엽이 감춰져 있다. 그처럼 태엽만 같았던 첫돌 사진 속의 아들놈도 어느덧 예비 중학생이랍시고 방학 내내 용돈 인상을 요구해오고 있다. 용돈 투정을 듣는 아비의 계절, 오는 절기에 덕담과 함께 꼬깃꼬깃 쌈지 달린 할머니 허리춤의 주름도 웃으셔야 할 철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외국 화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당신의 재산을 자신의 손으로 소비하지 말라.'이 경구는 검약의 교훈과 함께 본래 돈의 가치가 개인적 소비 이상의 베풂에 목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사랑의 지폐로 두툼해진 지갑을 품고 아버지들이 올해는 가슴을 펼 수 있고 우리의 세종대왕 도안의 지폐가 민족 번영을 염원하는 것이듯 국가살림도 잘 운영되길 희망해본다.

장두현<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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