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한 잎의 女子 1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한 잎의 女子 1 -오규원(1941~2007)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시집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199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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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시를 얻어서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야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갈매나무는 백석의 시를 얻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나무로 거듭났다. 백석을 떠올리면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고 서 있는 갈매나무가 버릇처럼 뒤따른다.

물푸레나무는 이 시를 얻어서 새로운 옷을 입었다. 오규원을 생각하면 그의 배경에는 어느새 이 나무가 자리 잡는다. 재질이 부드럽고 단단해서 농기구의 자루나 도리깨로 쓰였던 농경사회의 남성 이미지에서 돌연 명화 속의 18세기 로코코 양식의 모자를 쓴 여성의 이미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안타까운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베어 문 여자의 모습이 일렁인다. 물론 시가 지닌 품격이 남다를 때 따르는 덤이다.

물푸레나무 가지를 잘라 물에 담그면 물빛이 좀 더 맑고 푸르러진다고 한다. 물빛을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는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자와 연애를 하면 내가 막 푸르게 물들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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