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영원한 책임

'우물 속에/ 독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사람들-./ 우리들을 꾸짖어 주시는/ 신의 사자이겠지.// 귀여운 아이가/ 큰 길에서 매질하고 있었지./ 그 소리-./ 귀순민의 시체가.'

1924년 '일광'(日光)이라는 잡지에 실린 '모래 먼지'라는 시의 일부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방을 덮친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에 현혹돼 조선인들을 무참히 살육한 군대와 경찰, 자경단원 등 폭도들을 비난하고 일본의 만행을 고발한 오리쿠치 시노부(1887~1953)의 시다.

당시 그는 촉망받는 30대 중반의 민속학자였다. 국학원대학 교수였던 그는 대지진 당시 오키나와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귀갓길에 그는 자경단원들의 날 선 죽창과 마주쳐야 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느니 우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유언비어에 낯선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검문해 죽이는 그 몸서리쳐지는 현장 체험을 시로 썼다. 비록 절제된 표현이지만 그가 목격한 광기와 학살의 참상은 아마도 지옥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조선인을 가려내기 위해 '이치엔 고줏센'(1円50錢)을 발음하도록 그 자신도 강요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살해된 조선인 수가 231명이라고 발표했지만 민간 조사에서 나타난 학살자는 2천613명. 그 차이만큼 역사 인식은 틈이 크게 벌어져 있다.

이런 치 떨리는 역사를 또 부인하려고 일본이 안달이다. 최근 도쿄도 교육위원회가 고교 일본사 부교재에 기술된 '대지진의 혼란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됐다'는 표현을 "조선인이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다"로 바꿀 계획임이 드러났다. 여러 설이 있고, 모두 학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2008년 일본 정부가 펴낸 관동대지진 보고서에서 "유언비어에 의해 조선인이 가장 많이 살상됐고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가 많다"고 시인한 것을 정면으로 부인한 꼴이다. 제 입맛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분칠하는 일본 병이 이처럼 깊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어저께 공식 석상에서 "독일인들이 나치 범죄와 홀로코스트에 영원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사회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독일인들은 역사를 마주하고 사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어두운 과거사를 반성하는 독일과 끝까지 부인하는 일본. 역사 앞에 비겁하고 치졸한 일본은 더 이상 명예와 품격을 말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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