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녘인데 오히려 창이 환했습니다. 밤 동안 소리 없이 내려 쌓인 눈빛이 여명을 대신한 까닭이지요. 선잠을 털고 발코니 바깥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산과 들녘이 한 덩이로 온통 하얀 설원이 되어 있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은 날이 밝아도 그칠 줄 모릅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북천의 돌 징검다리가 눈 더미 속으로 폭 잠겨 버렸습니다. 나는 연구원까지 걸을 채비를 하고 나섰습니다. 텅 빈 도로, 눈길 위로 드문드문 자동차가 기어갑니다. 차 한 대가 온 도로를 다 차지하고도 좁은 듯이 뒤뚱거립니다. 더러는 길가에 차를 버려두고 걸을 작정을 합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너울을 쓴 무희들이 사뿐히 땅을 내려 딛는가 하더니 다시 하늘로 오를 듯 공중에 흩날립니다. 엉뚱하게도 에밀레종 겉면의 비천상을 떠올립니다.
입김을 길게 내쉬면서 걸음을 멈춘 나는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보다 더 큰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오로지 하나로 채색된 은빛 세상이 나의 감정 선율을 떨리게 합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하얗게 눈이 내리는 겨울 산길을 걸으며 소릿재를 찾아가는 유봉의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떠오릅니다. 눈이 먼 송화의 손을 잡고 목청을 길게 빼는 유봉의 '사철가'는 더운 기운을 죄다 쏟아내어 오히려 딱딱하게 얼어붙은 들판을 녹일 듯했지요.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모두 다 백발의 벗이로구나….'
유난히 추운 올겨울의 매서운 냉기에 아이도 어른도 잔뜩 무장한 옷매무시를 하고 동동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입니다. 종종 동사에 대한 안타까운 뉴스도 들리고 에너지 절감을 외치는 절박함에 걱정도 됩니다. 그래도 난 이 겨울을 사랑합니다. 겨울을 '동장'(冬藏)이라는 말로 달리하면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 들지요. 부지런하게 경작하고 거두어들인 알곡을 갈무리하는 절기라는 의미지요. 배를 든든히 채우고 땅속에서 동면을 즐기는 짐승들을 떠올려도 정겹고, 그루터기 위로 눈이 쌓이고 햇살과 바람이 머물러 있는 빈 겨울 논밭도 땅속에서 분주히 준비하는 새 기운이 느껴져 훈훈합니다.
교실 안을 후끈하게 데워주던 무쇠난로 위에 차곡차곡 쌓아 굽던 양철 도시락의 따끈한 온기, 시린 손을 입김으로 녹이면서도 하루 종일 얼음판 위에서 뒹굴었던 때 묻은 기억들도 모두 동장기의 몫입니다. 방안과 바깥의 극렬한 온도 차이에서 오는 상큼함, 채워짐과 비어짐을 뚜렷하게 해 주는 공간의 지각들…. 거기엔 변화를 호흡해야 하는 긴장감이 있어 설레고 무엇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자리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겨울은 크고 작은 도전을 즐겁게 안겨주는 계절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갖가지 에너지를 모으는 역동적인 작업 기간이니까요.
나는 아열대성 나라에서 몇 차례의 겨울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달력은 동지섣달로 내걸리지만 딱히 갈무리한다는 감정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산과 들녘이 늘 푸름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자연은 겨울의 쉼을 위한 별도의 준비를 하지 않는 듯하고, 사람들도 그리 긴장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겨울의 흥취가 없어 싱겁기 짝이 없더군요. 갈무리가 있는 겨울은 냉기와 온기를 적절하게 아우르면서 오히려 더운 기운을 앞세웁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롭게 피어나려는 미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네 선인들은 가을걷이를 마치고 겨울이 시작되는 음력 10월을 양복월(陽復月) 또는 소춘(小春)이라 했습니다. 봄날 같다는 의미지요. 겨울의 다순 햇살을 놓지 않으려 한 지혜로움으로 여겨집니다. 향나무는 눈 속에서 나이테를 그리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내고 주목도 설한의 바람을 에이면서 붉은 속살을 채워 천년살이를 해나갑니다. 나도 이 겨울, 결 고운 나이테 하나 더 그리려 합니다.
눈발은 여전히 그칠 줄 모릅니다. 눈 위의 내 발자국을 금방 흔적 없이 지워버립니다. 쌓여가는 눈 속에 깊숙이 젖어드는 동장의 율동을 나는 마냥 즐기고 있습니다. 수은주가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어도 내 맘의 온도는 그것보다 훨씬 웃돕니다. 계절의 윗목 같은 겨울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는지 모릅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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