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가을이 되면 '떨켜'라는 세포를 이용해 잎자루에 코르크 재질의 벽을 만든다. 나뭇가지에서 잎으로 나가는 수분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떨켜'를 만들어 잎을 버리는 겨울 준비 과정이다. 나무의 지혜를 생각하며 '골목투어' 시즌 2를 상상한다.
불과 2년여 만이다. 대구 중구의 계산동 일대 골목길 풍경이 확 달라졌다. 계산성당을 중심으로 반경 200~300m 이내에 있는 골목길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해설사의 마이크 소리와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는 학생들의 말소리가 보태져 '장터목'을 방불케 한다. 두어 해 만에 3만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들이 다녀갔다. 골목투어는 짧은 기간에 지역은 물론 전국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고의 체험 학습 콘텐츠가 됐다. 겨울이라 찾는 사람이 줄었지만 아이들의 숨결이 도심 골목으로 번져나가는 생기가 느껴진다. 잿빛 도시에 아이들의 발길 눈길 손길이 남긴 여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2008년, 전수조사를 통해 대구 구도심에 1천 개가 넘는 골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버려지다시피 한 좁은 골목길마다 가슴 먹먹해지는 삶의 흔적이 여전했다. 그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당연히 1천 개쯤은 되리라고 생각했다. '1,000개의 골목 1,000개의 이야기'는 요즘 대구 도심 골목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된 듯하다. 하지만 이 골목 대다수는 상대적으로 개발에서 소외된 구도심 북성로와 서성로 주변에 걸쳐 있다. 오랜 기간 손을 대지 않아 오히려 원형이 잘 보존된 역설적 공간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미로처럼 얽힌 구도심 근대골목길을 어떻게 개성 있게 살려내야 할지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실핏줄처럼 넓고 길게 퍼진 구도심 골목은 대구만의 자산이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이다.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일명 산복도로를 이용해 학교를 오갔다. 내가 다니던 산복도로 맞은편 감천2동은 산의 7부 능선까지 계단식 집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산이 생긴 모양에 따라 지어진 터라 아랫집 뒷벽이 윗집 앞마당 담장이 됐고, 윗집은 아랫집 뒷담 역할을 했다. 윗집에서 내려다보면 불규칙하게 들어선 옆집과 아랫집이 훤하게 다 보인다. 아랫집에서 보면 윗집도 같은 처지가 된다. 잃어버리기 일쑤였던 구불구불한 좁은 계단 길을 오르내리며 온갖 집 구경(?)하며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볼품없던 감천2동이 부산의 마추픽추로 불리며 국제 관광 명소 마을로 떴다.
여러 특징 중 공교롭게도 범죄 예방'보호 기능을 가진 환경 설계, 즉 셉테드(CPTED) 원리가 자연스럽게 도입된 점이 꼽힌다. 울타리가 없는 계단식 집 자체가 서로를 지켜주는 기능을 하여 마을의 안전이 저절로 확보된다는 것이다.
중국 베이징 구도심 '스차하이'(什刹海) 지구도 비슷한 이유로 주목받고 있다. 자금성 북쪽 1㎞쯤에 있는 이곳은 현재 600여 개의 골목길과 500여 채의 전통 가옥이 800년 역사를 지켜가고 있다. 명'청 시대 이곳 주변에는 3천 개가 넘는 골목과 수천 채의 전통 가옥이 있었다. 개발 지상주의로 인해 불도저에 밀리는 수난도 당했지만 지금은 북경의 대표적 관광 명소로 새롭게 부상했다. 중국 정부가 때늦은 반성과 함께 역사문화지구로 지정, 10여 년 전부터 지원금까지 지급하면서 보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곳 전통 가옥과 골목길은 각각의 고유 번호가 주어져 있다. 이방인도 쉽게 자신의 위치를 상대에게 알릴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연간 50여만 명의 외국 관광객이 두려움 없이 이곳에 발걸음을 놓는단다.
거창한 구호만이 쇠퇴한 도심과 골목을 살려내는 것은 아니다. 경관을 바꾼다든가 트레일을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조그마한 배려와 적절한 아이디어가 더 바람직할 수 있다.
막 입춘이 지났다. '떨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또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을 깨울 것이다. 이름조차 얻지 못한 투박한 구도심 1천 개의 골목에도 아이들의 소리가 스며들도록 골목길 깊숙한 곳까지 안전을 확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도심 골목은 문화 콘텐츠를 넘어 도시의 경쟁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진화 중이기 때문이다.
이권희/(주)ATB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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