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공백이 뚜렷하다-문인수(1945~)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시집 『적막 소리』(창비'2012)

아주 좋은 난해시는 문자와 문장 앞에 진퇴양난이고 아주 좋은 이해시는 속뜻과 여백에 들어서는 속수무책이다. 난해시는 길이 보이지 않는 무중이고 이해시는 여러 갈래 길이 저마다 뚜렷해서 아연하다.

이 시는 아주 좋은 이해시다. 독자들을 일사천리 무혈입성 시 속으로 흡입한다. 뭐 이리 싱겁냐고 시의 내실로 들어서는 순간 대략 난감이다. 정작 시의 안주인은 천 갈래 만 갈래 삶의 진경을 펼쳐 놓고는 슬쩍 자리를 비켜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진짜 시의 맛을 보는 것이다. 온갖 불편한 것들을 무장해제하고 푹 무질러 앉아 진경 속을 마음껏 노닐어 보는 것이다. 눈물 부류들은 손수건을 건네받을 것이고, 절망 종류는 희망으로 교환될 것이다. 아주, 각자의 경우에 알맞게, 꼭 그만큼. 편한 사람은 속이 깊은 법이다

시인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평양 무인기 의혹' 사건으로 징역 30년을 선고받았으며, 그의 변호인 김계리 변호사는 재판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브리핑 데이터를 준비중입니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향하던 KTX-산천 열차가 동대구역 인근에서 고장으로 인해 승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으며, 승객들은 약 20분간 객실 안에서...
미국과 이란은 전쟁을 끝내는 양해각서(MOU)에 잠정 합의하였으며, 이란은 핵 포기를, 미국은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