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덜 생긴 마스크에 늦깎이 데뷔
# 순진과 비열함 사이 중년 연기
# 비슷한 역할도 새 캐릭터 창출
지금 황정민은 충무로의 자석이다. 그가 붙으면 죽은 시나리오는 살아나고, 덤덤하던 연기자는 일어서며, 꺼리던 투자는 한번에 해결된다. 지금 충무로에서 그보다 더 강한 자석은 많지 않다. 멜로 드라마에서 갱스터, 코미디, 심지어 퀴어시네마에 이르기까지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넓고, 강우석에서부터 임순례, 정윤철, 민규동, 임상수, 이준익, 류승완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감독을 만났으면서도 고유한 연기력을 잃지 않았다. 황정민은 언제, 어떤 연기를 하더라도 황정민이다. 지금 황정민은 충무로의 완전한 '갑'이다.
2001년 10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로 갓 데뷔한 배우 황정민이 지금의 황정민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거의 없었다. 당시 이 영화에는 황정민 외에도 여러 신인들이 있었다. 주인공이었던 이얼, 밉지 않은 바람둥이를 연기한 박원상, 음악에 빠진 고교생을 연기한 박해일 등이 그러했다. 이들에 비해 오히려 황정민은 순진하고 투박해 보이는 마스크, 드러나지 않는 연기를 하는, 다소 평범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니, 황정민이 가장 높은 위치에 우뚝 서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난 10년을 지속했던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의 '트로이카 시대'는 이제 저물었다. 야속하게 말하면, 이들의 시대는 '갔다'. 송강호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설경구는 결혼(을 둘러싼) 이미지 때문에 흥행력이 떨어졌고, 최민식은 50대의 나이가 되었다. 이 나이에 주연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올드 트로이카'가 차지하던 이 자리를 황정민, 하정우, 류승용이 넘보고 있는데, 관심은 '뉴 트로이카' 시대의 헤게모니가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이다. 가장 젊고 연기력도 탄탄한 하정우인가, 연이어 천만 영화를 양산한 류승룡인가, 지금 에너지를 한창 품고 있는 황정민인가? 누가 더 낫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호각지세지만, 지금 시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황정민이다. 바야흐로 2013년 전반기 영화계는 '황정민 전성시대'다.
'신세계'는 황정민이 있어 살아날 수 있었다. 최민식은 폭력 조직 내부에 후배 경찰을 스파이를 심어둔 이의 심리를 좀더 이중적으로 불안하게 연기해야 하는데 강하게 밀어붙인 느낌이 들고, 이정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를 잘 보여주었지만 결정적인 힘이 달려 아쉬움이 강했던 반면, 황정민은 조직과 후배를 신뢰하고 원칙을 믿는 조폭을 너무도 신랄하게 연기했다. 의리 있는 형님과 냉혈한 조폭의 이중적인 이미지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왔다갔다하면서 마스크를 수시로 변화시켰다.
'전설의 주먹'에서 황정민은 학창시절 '좀 놀았던' 과거를 반성하며, 아내와 사별한 채 딸을 키우고 있는 국숫집 아저씨를 연기했다. 어수룩해 보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그러나 아픔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시대 가장이 거기 그대로 살아 있었다. 링에서 맞붙은 옛 친구에게 진솔히 다가갈 수 있고, 조폭의 탐나는 제의를 거절하는 용기도 지니고 있는 사람. 동창회에 갔다가 욕만 얻어먹고 쓸쓸히 계산을 하고 돌아 나오는 그의 뒷모습은 황정민의 얼굴이기에, 그의 체격이기에 가능했다.
돌이켜 보면 황정민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로드 무비' '바람난 가족'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너는 내 운명'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행복'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부당거래' '댄싱퀸'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리듬을 보면, 확실히 황정민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드 무비'에서 제대로 된 연기자라는 것을 증명했고, '너는 내 운명'에서 어떤 역할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렸으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연기 폭이 참으로 넓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댄싱 퀸'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아우라를 재현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는 대부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제까지 황정민은 순진한 중년에서 비열한 중년으로 이어지는 그 어디쯤을 연기했다.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순진한 아저씨,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비열한 아저씨가 그가 스크린에 재현한 역할이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바라보는 아저씨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아저씨는 순진한 소년을 품고 있는 이들과, 세상에 닳고 닳아버린 이들로 양분된다. 아마 그리 잘 생기지 않은 마스크와, 늦게 데뷔한 나이 때문에 그가 이런 자리에 자주 기용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때문에 나는 황정민이 더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배우에게 비슷한 배역을 반복해 연기하는 것만큼 그를 빨리 상하게 하는 것은 없다. 황정민은 비슷한 역할을 맡지만, 비슷한 연기를 하지는 않는다. 이전 영화에서 재현한 캐릭터를 반복하지 않는다. 비슷한 역할이라도 달리 해석해 새로운 캐릭터로 창조해낸다. 단 4컷밖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를 선명하게 각인시켰던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을 그는 다시 스크린에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변조하고 변용해서 다른 캐릭터'들'로 만들어냈다. 누구보다 황정민에게는 이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시대가 좀 더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강성률<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rosebud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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