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울진읍에서 후포읍을 거쳐 영덕군 영해면으로 넘어왔다. 영해면은 인접한 병곡면과 축산면, 창수면의 생활권이 집중되는 지역이다. 면 단위치고는 인구가 많고 상권도 활성화돼 있다. 영해면 괴시리 전통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괴시리까지 1장 주세요." 가만히 바라보던 직원이 "표 끊지 마세요"라고 한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봤다. "자, 지금 문밖으로 나가 동쪽으로 꺾어서 걸어가세요.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직진하세요. 네거리가 나와도 직진, 오거리가 나와도 직진. 15분만 걸어가면 됩니다." 15분쯤 걸으니 무리 지은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학교 방향으로 꺾으면 괴시리 전통마을이다.
◆고집스럽던 마을의 변신
오후 늦은 시간, 햇빛이 불그스레 누그러진다. 괴시리 전통마을은 망월봉 아래 전통 가옥 3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이었지만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목은이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며 괴시로 불렀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 정도는 아니지만 정비가 잘 돼 있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 3대 평야인 영해평야가 펼쳐진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김명호(56) 이장을 만났다. 김 이장은 영양 남씨 집성촌인 이곳에서 타성(姓)으로는 처음으로 이장을 맡고 있다. 집들은 'ㅁ' 자 형태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모습이다. 뜰을 마주 보고 사랑채 뒤에 안채를 숨겨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사대부가의 건축 양식이다. 괴정(槐亭), 영해 구계댁(邱溪宅), 영해 주곡댁(注谷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 국가 및 도 문화재자료만도 14점이나 된다.
마을 길은 여느 전통 마을의 돌로 된 담장과 달리 흙을 짓이겨서 만든 흙담이다. 250여 년 전에 지은 집들이 대부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원래 상당히 폐쇄적인 마을이었어요. 유교문화사업을 위해 조사를 하려고 해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김 이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마을 분위기가 꽤 달라졌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대부분 대문을 열어둔다. 주말에만 오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정도만 문을 걸어둘 뿐이다. 매년 4~11월까지는 주말마다 부녀회에서 괴시마을 고택문화체험 강좌도 운영한다. 마을 중심에는 400여 년 수령의 버드나무가 있다. 매년 한마당축제가 열리면 주민들은 나무에 새끼줄을 매고 소원종이를 내건다. 김 이장은 "강릉의 초당두부처럼 목은 두부를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했다. "괴시마을에는 700여 년 전부터 두부를 만들었어요. 목은 문집에도 외가에서 어릴 적에 먹은 두부를 예찬한 글이 있으니까요. 지역에서 난 콩과 영해 앞바다의 깨끗한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 겁니다."
◆활력이 넘치는 항구의 아침
다음날 오전 일찍 길을 나섰다. 때마침 영해면 장날이다. 영해 장날은 1919년 3월 18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봄을 맞은 장터는 나물 잔치였다. 산에서 채취한 두릅과 달래, 취나물, 냉이, 민들레가 난전에 쌓여 있다. 싱싱한 수산물들도 넘쳐난다. 입을 뻐끔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복어와 싱싱한 생선들이 눈길을 잡는다.
생선 난전에서 거대한 개복치를 넋을 놓고 봤다. 상인이 사람만 한 개복치를 반으로 자르고 내장을 제거했다. 지느러미와 부위별로 토막을 내고 깨끗하게 씻어둔다. 개복치의 살이 연해 칼과 손으로도 정리가 될 정도로 흐물흐물하다. 개복치는 삶아서 초장을 찍어 먹는데, 영덕에서는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될 음식이다. "요즘 결혼식이 많고 잔치가 많은 계절이잖아요. 마침 이맘때가 되면 깊은 심해에 살던 개복치가 얕은 연안으로 나와요. 딱 시기가 맞는 거죠." 개복치를 썰던 상인의 말이다. 장터 구석에는 닭과 오리, 칠면조, 개, 고양이, 오골계를 산채로 파는 상인도 눈에 띈다. 우리에 갇힌 장닭이 시간도 모르고 꼬끼오 울어댄다.
오전 9시 영해읍에서 버스를 타고 축산항으로 갔다. 축산항은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항구를 따라 죽도산 전망대로 걸었다. 새벽에 조업을 나갔다가 돌아온 대게잡이 배의 그물 손질이 한창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아주머니가 소리를 친다. "아지매 찍으면 세금 내야 되는데?" 농에는 농으로. "얼마요?" "몰라요. 호호." 위판장에서는 꽁치를 그물에서 떼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노란색 플라스틱 통에는 막 떼어낸 꽁치가 가득 담겨 있다. 떼어낸 꽁치는 흠이 많아 통조림이나 젓갈용으로 쓴다. 작업복을 입고 꽁치를 떼어내는 옆에서는 생선이 마르지 않도록 바닷물을 뿌렸다. 막 상자에 담겨 트럭에 실리는 꽁치의 비늘이 햇볕에 반짝거린다.
◆바다와 맞닿은 솔숲을 따라 걷다
축산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는 죽도산 전망대다.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 축산항의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영덕 블루로드 B코스의 시작이 여기서부터다. 올라온 길 반대편으로 난 현수교를 건너면 본격적인 해안길이 시작된다. 영덕 블루로드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거친 해안 바윗길을 조심스레 걷다 보면 할미산 자락의 소나무 숲길을 만난다. 절벽을 때리는 파도소리와 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전을 스쳤다. 해안 가까이 갯바위 근처에서 수면 위를 오르내리는 해녀들의 물질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축산항에서 경정2리까지 4㎞ 구간은 '초병의 길'로 불린다. 바위 위 곳곳에 설치된 해안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들이 오가던 길이다.
숲길은 잠시 영덕의 대게원조마을인 경정2리에서 숨을 고른다. 경정2리는 조용한 어촌마을이다. 미역을 말리는 어민들 곁을 지나 잠시 포장길을 걸으면 다시 절벽길로 접어든다. 거친 바윗길과 나무 데크가 이어지는 길을 1시간가량 걸으면 석리다. 석리에서 해맞이공원까지는 버스로 가기로 했다. 해안에서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오르막길을 10분 이상 숨차게 걸어야 한다. 오후 1시 10분 영덕읍행 버스를 타고 10분을 달리니 해맞이공원이다. 대게의 집게다리를 형상화한 창포말 등대가 눈에 확 들어온다. 고개를 돌리면 영덕풍력발전단지의 거대한 프로펠러가 휭휭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임도를 따라 2㎞가량 걸으면 닿을 수 있지만 포장길을 계속 올라야 하고 차량 통행이 많아 걸어가는 건 권하지 않는다.
◆오십천에는 황금은어가 산다
해맞이공원에서 오후 3시 20분 영덕행 버스를 탔다. 영덕읍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오십천은 영덕읍을 관통해 강구항까지 이어진다. 이곳에는 황금은어가 있다. 9, 10월에 알에서 부화한 은어는 바다로 나가 자란 뒤 이듬해 3, 4월이 되면 오십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특히 영덕의 황금은어는 크기도 크고 몸 빛깔도 선명한 노란빛을 띤다. 보통 다 자라도 15㎝ 정도인 여느 은어와 달리 오십천에 사는 황금은어는 25㎝까지 자란다.
황금은어는 백사장이 사라지면서 개체 수가 크게 줄었다. 30여 년간 황금은어 지킴이로 활동해온 박재훈(56) 씨가 지난해 잡아 얼려둔 황금은어를 내왔다. 아직 채 녹지 않았는데도 수박향이 은은하게 난다. "은어는 부화한 지 일주일 이내에 바다로 가야 해요. 산란을 하려면 물이 맑은 상류까지 올라와야 하고요. 그런데 농수용 보가 문제예요. 평소 물고기가 보에 설치된 어도를 타고 상류로 올라갈 수 있지만 산란철이면 몸이 무거워 어도로 올라가지 못 해요." 은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하류에 알을 낳게 되고, 알은 염분이 섞인 물에 썩거나 다른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다행히 영덕군은 회귀하는 은어에서 채란해 부화시킨 뒤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7년째 하고 있다. 영덕에서 은어가 남아 있는 중요한 이유다. 박 씨는 가을에 채란해서 바다로 보내고 갈수기에는 갇힌 은어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작업도 한다. 학문적 지식보다는 오랫동안 오십천에서 활동해 온 경험의 산물이다. 그는 직접 수정란을 만들어 부화시키고, 새끼도 방류한다. 경험의 열쇠는 수온이다. "한번 균형이 깨지면 은어는 절대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온 강에 은어의 수박향이 감돌 때까지 살려내야죠."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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