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순흥인 추산 안황과 대구 동구 내동 안정자나무

정자처럼 길손이나 주민들이 쉬기 좋은 곳

대구공항을 지나 팔공산으로 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고개가 파군재다. 고려 초 왕건과 견훤이 싸울 때 왕건의 군사가 대패한 데서 유래된 고개다. 그곳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으면 파계사로 가고, 직진 신호를 받으면 동화사나 갓바위로 간다.

직진해서 그대로 쭉 나아가다 보면 공산터널이 나오고 터널을 지나 첫 정류장이 미대마을이다. 이곳은 인천 채씨들의 집성촌이다. 내려서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 편으로 인도를 따라 걷다 보면 몇 집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동(內洞)이라고 한다.

길이 비교적 넓어 승용차는 쉽게 다닐 수 있다. 좀 더 들어가면 잘생긴 큰 느티나무가 나온다.

동구청 지정 보호수로 안내판에는 '수령이 500년으로 고려 명현 안유의 후손 안황이 애호한 정자라고 하여 안정자나무라고 하며 안정자비가 있다'고 써 놓았다.

안유(安裕'安珦이라고도 함, 1243~1306)는 너무나 유명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분이다. 본관이 순흥으로 아버지는 밀직부사 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이다. 대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289년(충렬왕 15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주자서(朱子書)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왕에게 청하여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를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1304년(충렬왕 30년)에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박사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섬학전은 일종의 육영재단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기반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린다. 1319년(충숙왕 6년) 문묘에, 그 후 영주의 소수서원, 장단의 임강서원, 곡성 회헌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이런 명문의 후예인 안황(安璜)은 호가 추산(秋山)으로 원래 청송에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화를 면하기 위해 이곳 옥정(玉井'당시 마을 이름)으로 은거했으며 벼슬이 판결사(노비의 송사를 전담하는 장례원의 으뜸 벼슬, 정3품)였다고 한다.

팔공산 자락인 내동은 골짜기가 깊다. 추산은 이곳에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언젠가 폐허가 되자 손자 안신영(安信永)'신걸(信傑) 형제가 추산이 살던 집 뒤에 심은 느티나무다.

비문에 의하면 '무더운 여름날 왕래하는 길손이나 주민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휴식하였는데 편안하기가 정자와 같다(安如亭子)라고 하였고, 또 안씨들이 이 나무를 정성스럽게 수호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자(安亭子)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구청에서 만들어 놓은 안내판의 내용과 다소 상이한 점이 있다. 안황이 임란 때의 인물이고 심은 이가 손자라면 수령도 400여 년 정도가 알맞을 것 같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살던 곳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유허지에 나무를 심고 대를 이어 보살피고 있는 사실만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또한 길을 걷는 나그네나 들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원한 그늘에서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특히, 이 길은 재 너머 신용동에서 태어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그는 이 길을 통해 공산초등학교에 다녔다. 언젠가 읽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그가 육군사관학교에서 럭비 선수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강건한 체력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해 질 녘 늦은 하굣길이 너무 무서워 뛰어다녔던 것이 몸을 단련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최근 걷기 열풍이 불면서 동구청에서는 대표 길로 '왕건 길'을 만들었는데 이 구간에도 안정자나무가 포함되어 이래저래 많은 사람이 쉬어가고 있다.

참의공파인 후손 안상도(상생농원 대표) 씨에 따르면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세월을 거치면서 나무도 덩치가 커져서 수관 폭이 동서 21m, 남북 25m나 되어 지금도 길손의 쉼터로 정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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