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이미 대세다. 거의 모든 생활을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전화 한 대로 해결하는 세상이다. SNS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익숙한 일상이다. 그러나 편리해진 생활만큼, 늘어난 '사이버 친구' 숫자만큼 더 행복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외롭고 고독해졌다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음식을 매개로 관계를 맺는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이 확산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낯선 사람과의 식사! 어떤 느낌인가? 불편한가? 기대되는가? '스마트 세상' 밖으로 한번 걸어 나가보자.
◆같이 식사 한 번 하실래요?
22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레스토랑 '소셜 살롱'. 어스름이 깔릴 무렵 예약된 자리로 손님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이방인'들이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란 인사가 오간다.
이날 참석자 7명을 식탁에 모이게 한 것은 한가지 공통 관심사. 강연자로 초청된 조윤석 씨의 인생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다. '황신혜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조 씨는 '홍대 문화' 태동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샐러드와 피자 등 요리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화는 밤 9시쯤 끝났다. 이야깃거리는 대구의 문화적 놀거리와 각자의 결혼관 등 편한 소재였다. 직장인 이윤영(26'여) 씨는 "맛있는 밥과 인생 선배의 진솔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며 "소셜 다이닝에 관심이 있는 친구, 직장 동료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또 대학생 CEO로서 문화행사 기획사를 운영한다는 주효준(26) 씨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편하게 만난다는 게 소셜 다이닝의 매력"이라며 "SNS에서의 대화는 아무래도 피상적이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SNS의 하나인 '페이스북'은 이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오프라인 만남이 온라인 서비스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셜 살롱'의 기획을 맡고 있는 전충훈(39) 씨는 "매달 한 번씩 모임을 마련하고 있는데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하자마자 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며 "이야기를 나누고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소셜 다이닝이 평소 만나기 힘든 사람을 초청해서 이야기 듣는 형식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경북대 후문 근처에 자리 잡은 카페 '어색하지 않은 창고'는 매달 한 차례 정도 '네트워크 파티'를 연다. 대학생'활동가'직장인 등 지역 2030세대들이 고객 대부분이다. 참가비 1만5천원을 내고 어묵탕'치킨샐러드 등을 안주 삼아 저녁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운다.
하지만 이들을 특정 카테고리로 묶기는 힘들다. 관심 있는 분야도 서로 다르고, 종사하는 일도 무관한 경우가 많다. 이들을 묶어주는 역할은 페이스북 친구가 1천100명 정도 된다는 박성익(28) 대표가 맡고 있다. 스스로를 '링커'(linker), '마담'이라고 부르는 박씨가 참가자 각자의 성향을 파악해 자리를 안내할 때도 있다.
박 대표는 "다른 영역의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창의적인 발상이 이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며 "혈연'지연'학연을 벗어난 관계에 참석자들이 처음엔 어색하고 힘들어하지만 나중에 편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공동사업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며 "정치'종교는 대화 주제에서 배제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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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근처에 있는 대안공간 '인문학 놀이터'에서는 봄'가을철 기획행사로 '어색한 데이트'를 진행한다. 각각 3명씩의 미혼 남녀가 촛불 아래에서 와인과 치즈, 과일 등을 먹으며 서로를 '탐색'한다. 소셜 다이닝이 때로는 분홍빛 인연을 맺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참가비도 1만원으로 저렴하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출연해서 서로 짝을 찾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독서 모임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소설'인문학'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한 권씩 가지고 와서 소감을 말하고 느낌을 공유한다.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간'을 표방하는 이곳의 콘셉트 그대로다.
박선미(35) 대표는 "모여서 공부하자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했다"며 "상대방의 학력'연봉 등 조건보다 가치관'인생에 대해 알아 가면서 누구나 자신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 "밥을 같이 먹어야 정이 든다는 말처럼 음식이 주는 매력은 크다"며 "북&무비, 북&비어, 북&와인 등의 행사를 통해 질 높은 삶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을 가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지역사회의 건강한 문화 조성이 그의 목표다.
대구 중구 약령시 서문 옆에 자리 잡은 '예술도가 룰루랄라'는 지역 소셜 다이닝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곳 가운데 하나다. 녹색소비자연대 활동가 출신으로 '사회적 주부'를 자처하는 미나(36) 씨가 차려내는 '지구를 위한 밥상' 덕분이다. 5년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으며 유기농 채식 위주의 식단이 월 1회 꾸며진다. 때로는 마트에서 할인판매하는 폐기 직전의 농산물을 일부러 구입하기도 한다.
21일 저녁에는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대구지회 관계자 20여 명이 참여했다. 메뉴는 양배추 현미쌈, 가지나물, 새송이버섯, 두부, 애호박, 미나리, 빈대떡 등이었다. 식사 가격은 5천원.
미나 씨는 "돈 없이도 재미나게 살자는 취지로 행사를 열고 있다"며 "대학생'직장인'주부 등이 식사를 하면서 책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눈다"고 했다. 또 "최근 시작한 여행잡지 읽기 모임에서는 함께 여행을 간 회원들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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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다이닝은 고대 그리스의 식사문화인 '심포지온'(Simposio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유럽에선 예전부터 파티 문화의 하나로 대중화됐다.
이름도 생소한 '소셜 다이닝'이 국내에서 핫 트렌드로 떠오른 것은 지난해부터. 지역에서는 아직 초창기이지만 서울에서는 큰 인기를 얻어 '집밥' '위즈돔' '둘러앉은 밥상' 등이 유명하다. 국내 공중파의 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실공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소셜 다이닝이 2030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현상 역시 현실적인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매번 같은 사람과 밥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집에서 혼자 먹자니 재미가 없다. 같은 '행동반경'을 갖고 있거나 '주파수'가 맞는 사람과의 식사라면 금상첨화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음식을 함께 먹는 동안 편안해지고, 공감대가 형성된다. 식탁에는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따뜻한 대화, 소통과 교류, 유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더욱 심화됐다는 '군중 속의 고독'도 사람들을 오프라인으로 불러내고 있다. 모바일 SNS의 급속한 발달로 얼핏 개인의 네트워크가 강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SNS 활동을 많이 하더라도 편하게 밥 같이 먹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소셜 다이닝을 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모임에 여러 차례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낯선 사람과 밥을 먹는 게 생각만큼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단순한 재미를 위한 것도 아니다. 식탁을 공유하면서 내면적인 성숙 또는 힐링을 얻는다. 최신 스마트기기로 무장한 채 고립된 섬처럼 살아가는 '스마트 아일랜드족'들의 소통 방식이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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