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14>한국전쟁과 의료

교수도 학생도 전쟁 참여 국군·유엔군 북진 거듭…

동산기독병원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병원을 운영하면서 전투에서 다친 경찰관들을 치료했다. 이때 많은 부상자가 팔과 다리를 잃었는데, 이들을 위해
동산기독병원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병원을 운영하면서 전투에서 다친 경찰관들을 치료했다. 이때 많은 부상자가 팔과 다리를 잃었는데, 이들을 위해 '의수족부'를 만들어 많은 의수와 의족을 제공했다. 사진 제공 = 계명대 동산의료원

1950년 6월 25일 터진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다. 모든 분야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고, 만 3년1개월간 전후방 없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유례를 찾기 힘든 파괴전과 소모전이 이어졌다. 한국군과 유엔군 약 150만 명, 북한군과 중국군 약 250만 명이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남한에 있던 공장 거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국내 의료체계도 한꺼번에 파괴시켰다. 전국에 있던 1천여 개의 병의원이 파괴되거나 문을 닫았고, 의료장비는 부서지거나 잃어버렸으며 의약품은 쓸 수 없게 됐다.

◆임시 건물에서 의과대학 수업 계속

경북대 의과대학 수업은 일시 중단됐다. 그 해 7월 19일 의대 본관 건물은 유엔군 주둔으로 군에 넘겨졌고, 부속병원도 육군병원으로 사용하게 됐다. 이후 의과대학 임시사무소가 중구 포정동에 있던 경상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한쪽 구석으로 옮겨졌지만 제대로 된 업무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 대학 강의는 잠시 중단됐다가 계속 이어졌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군에 입대하지 않고 남아 있는 학생들과 서울에서 피란 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구시내 종합병원에서 연합교육을 실시했다. 곧이어 전시(戰時) 종합대학 형식으로 학년별 10명씩 학생들을 모아 의과대학 관사 부지에 있는 임시 건물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0월엔 중구 포정동에 있던 사립대학 청구대 건물의 일부를 빌려 강의를 하기도 했다. 11월부터는 천주교성가병원(현 대구파티마병원), 서부시립병원, 적십자병원 등에서 임상실습을 했다.

이듬해 9월 10일에는 중구 삼덕동에 임시 건물을 새로 지어 부족한 교실을 보충했다. 이달 24일부터 참전했던 일부 학생들이 복귀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강의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됐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2년 6개월이 지난 1953년 1월 26일 군에 징발됐던 대학 건물 및 병원 시설이 학교에 반환되면서 강의와 치료는 정상화됐다. 그러나 전쟁 중에 소실된 기자재와 학술서적들은 단기간에 복구되기 어려웠다.

◆전교생 궐기대회를 통해 참전 결의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 되자 전 국민 동원체제가 실시됐다. 대부분 젊은 의과대학 교수들은 군의관으로 입대했고, 징집 연령을 넘어선 원로 교수들은 적십자사 구호반에 편입돼 전쟁 부상자와 일반 환자의 치료를 맡았다. 학생들도 군인이 되거나 학도병으로 전선에 투입되자 학교와 병원 모두 정상적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대구의과대학 학생들은 6월 28일 오전 11시 중앙강당에서 전교생 궐기대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학생이 혈서로 입대 원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당시 자원입대한 학생 중에 4학년은 군의(軍醫) 소위로 참전했고, 3학년 이하는 보병이나 위생병으로 집단 입대해 전선에 배치됐다. 당시 자원입대한 학생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거듭했다. 의과대학생들의 참전과 관련한 '경북대병원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1950년 10월에 전개된 평안북도 덕천지구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와 실종자를 내게 된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때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동기생은 1949년에 입학한 학생들이었고, 전쟁 후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대구의과대학 학생은 20여 명 정도였다. 이들을 추모한 기념비가 1978년에 교정에 건립됐다.'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의과대학생들은 1951년 3월 군의 방침에 따라 군복 차림으로 학교로 돌아와 학업을 마치게 됐고, 졸업 전에 군의관 중위로 임관돼 졸업과 동시에 전방으로 배치됐다.

◆부상 경찰관 돌본 동산기독병원

동산기독병원은 전쟁 중에 경찰병원 역할을 했다. 전쟁 발발 두 달도 채 안 돼 북한군은 칠곡군 동명면과 가산면 다부동 일대까지 밀고 들어왔다. 정부도 대구로 피란 온 상태였고, 시민들은 점점 가까워지는 포성 때문에 불안에 떨었다. 이후 정부는 다시 부산까지 피란을 갔지만, 당시 내무부장관 조병옥은 대구사수론을 밝히며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이때가 8월 18일이다. 당시 강원도 경찰대를 주축으로 한 피란 경찰관들은 육군과 함께 다부동 능선에 배치돼 진지를 구축하고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많은 경찰관이 부상당했지만 치료해 줄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대구도립병원(현 경북대병원)은 이미 육군 측이 육군병원으로 징발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부상 경찰관들을 치료할 여력이나 치료기술을 갖춘 병원은 동산기독병원밖에 없었다. 동산기독병원은 1950년 9월 26일 내무부 치안국 소속 경찰병원 경북분원으로 위촉받고 옛 진찰실 건물을 경찰관 전용병동으로 사용했다. 직원들은 과장급 이상은 경감, 주임급은 경위, 일반 직원은 경사, 이밖에 사람들은 순경 등의 계급을 주었다. 모든 직원이 경찰관이 됐지만, 봉급은 병원에서 지급했다.

부산 동래초등학교에 경찰병원 분원이 있었는데, 의사들은 교대 근무를 했다. '동산의료원 100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교대 근무를 하러 부산으로 가거나 대구로 올 때 경찰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고, 권총을 차고 다녔다. 당시 길에 나서면 경찰의 검문이 가장 귀찮았는데, 이때부터는 검문 경찰이 깍듯이 바치는 경례를 받아가며 다닐 수 있었다.'

해방 후부터 1953년까지 동산기독병원의 진료과별 외래 및 입원환자 통계를 보면, 1948년과 1949년 7만7천 명 안팎이던 환자 수는 전쟁이 터지고 나서 1950년 11만2천여 명, 1951년 16만4천여 명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특히 입원 환자는 전쟁 전만 해도 1만5천~1만7천 명 선을 헤아렸으나 1950년 4만3천여명, 1951년 5만2천여 명으로 3, 4배가량 치솟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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