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서 조국 광복활동을 하다 오해로 아군 총탄에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1881~1928)은 외교노선을 택한 이승만과 함께 하와이 독립운동의 두 거목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4년 도미(渡美),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1909년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위해 미국 내 최초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웠다. 1912년엔 13명의 첫 졸업생도 냈다. 또 1912년엔 무대를 하와이로 옮겨 1914년 조국 독립전쟁을 위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받은 130여 명의 인력을 키워 독립전쟁 준비에 나섰다.
1919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뽑혔으나 이승만과 노선이 맞지 않아 취임하지 않고, 그해 5월 북경으로 떠나 신채호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를 결성하는 등 무력독립의 길을 걸었다. 1926년엔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북경에 대본공사를 설립, 중국 미개간지 구입과 개간을 통한 독립운동 기지건설과 독립군 양성자금 마련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변절했다'거나 '일본의 밀정이다'는 등의 잘못된 소문으로 독립단체인 의열단원(이해명)의 총격으로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간질에 능한 일제의 계략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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