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에 즐비한 아이들의 사물함/ 번호대로 숫자만 두세 개 적힌 채/ 자물쇠 꼭꼭 잠긴 아이들의 세계/ 어쩌다 살짝 들여다보면/ 그 좁은 곳에도 살림살이 다르다/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도 붙여놓고/ 예쁜 인형도 하나, 좌우명도 걸어 놓았다/ 겉으로 보면 꼭 같은 네모잡이 상자 속에/ 삐뚤삐뚤 아기자기 아이들의 표정이 차곡하다/ 같은 교복에 같은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같은 선생에게 같은 교과서를 배우지만/ 하나도 같은 마음 없듯이/ 저 작은 사물함도 신기하게 제각각이다(조향미의 시 '표정이 있는 사물함' 중에서)
학교에 가면 사물함이 있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교과서를 배우고, 같은 문제집을 풀고, 같은 선생님에게 배우는 아이들이 같은 모양의 사물함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모양이나 사물함이 나란한 모양은 기막히게도 같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모습은 무척 다르다. 머리가 짧은 아이, 긴 아이, 눈이 큰 아이, 귀가 작은 아이…. 사물함이라고 같은 건 아니다. 같은 모양의 이름표 안에는 다양한 모양의 사물함 내부가 있다. 사물함 속은 그대로 아이들의 마음이다. 아이들은 바로 그 마음을 따라 자신의 꿈을 꾼다.
최근 어떤 단체에서 실시한 진로 캠프를 지켜봤다. 진로 캠프라기보다는 대학의 학과를 설명하는 진학 설명회에 가까웠지만 직업에 대한 설명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인 '진로적성검사를 통한 멘토샘과 진로 상담 및 동기 부여 멘토링, 멘토샘과 함께 자기주도학습 멘토링, 시험 준비 전략, 스터디 플랜 짜기, 과목별 공부법 전수, 입시 전략 상담 등 자기주도 학습을 위한 노하우 전수' 등은 사실 진학 프로그램과 다름없었다. '경영, 경제, 광고, 애니메이션, 과학, 법, 교사(교육), 기자(언론), 마술사, 네일아트' 등의 항목으로 나눈 직업체험은 다소 흥미로웠으나 그것이 직업의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다. 소위 진로 교육과 관련된 수많은 사교육업체들의 프로그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마련한 인터넷 사이트 커리어넷이나 진로 교육 전문가들은 다양한 직업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직업들이 어떤 일을 하고, 전망이 어떠냐 하는 정보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선택 주체인 아이들의 관심과 적성이다. 내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현재의 불편한 진실이다.
진로 교육은 직업 교육이 전부가 아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만이 진로 교육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진로 교육의 본질이다. 따라서 진로 교육은 인성 교육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책쓰기를 함께한 어떤 학생의 꿈은 사회복지사였다.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서 홀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살피고 싶다는 것이 학생의 소망이었다. 책이 출판되고 난 다음 학생의 꿈은 CEO로 바뀌었다. 하지만 학생이 진학한 곳은 간호학과였다. 이 학생의 변화는 진로 교육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대전제 아래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는 다양한 형태로 바뀔 수도 있다. '소외받은 계층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전제 아래 사회복지사, CEO 그리고 간호사는 결코 다른 직업이 아니다.
학생은 분명 간호사가 되어 홀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게다. 학생의 꿈은 사회복지사나 CEO, 또는 간호사가 아니라 홀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이다. 진로 교육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로 교육의 출발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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