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예술 전도사'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생활속 예술 확산 거침없는 아이디어…선친 장례때 문상객에 청해 연주회도

1993년 문을 연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는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국립예술대학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각종 콩쿠르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피아니스트 손열음'김선욱, 소프라노 홍혜란 등이 모두 이 학교를 졸업했다.

개교 초창기, 영화배우 장동건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세를 탔던 이 대학이 길지 않은 역사에도 명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우수한 교수진의 열정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재임 20년 만에 처음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난 홍승찬(52) 예술경영과 교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예술 전도사'를 자임하며 활발한 강연'저술 활동을 펴고 있는 그를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만났다.

◆대한민국 '예술경영' 1세대 교수

홍 교수는 한예종의 개교 준비 과정부터 참여했다. 초대 총장이었던 이강숙(77)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경북 청도 출신인 이 교수는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음악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 최초의 음악학자로 10년간 한예종 총장을 지냈다. 홍 교수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 시절부터 이 교수를 사사(師事)했다.

"처음에는 이 총장님의 비서 역할도 했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 꾀를 부리다가 혼도 많이 났습니다. 총장님께서 '나는 이 학교의 성공에 목숨을 걸었다. 너는?"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것 같았죠. 2회 입학생을 뽑을 때에는 학교 홍보를 위해 예술계 고교에서 '교수 음악회'를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가 아내의 출산도 못 지켜봤습니다. 총장님이 '실패하면 사표 써야 한다'고 못 박으시는 바람에…. 허허허!"

홍 교수는 예술경영학 분야 1세대 교수다. 예술 분야에 경영학 개념을 접목시킨 것으로, 공연장 등 관련 기관'단체들의 운영 방안이나 마케팅 전략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대학원이 아닌 학부 과정에 예술경영과가 마련된 것도 한예종이 처음이다. 1993년에 그가 펴낸 '예술경영 입문'은 단독 저자가 쓴 이 분야의 첫 저서였다.

그 덕분에 외부 강연도 잦다.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재능기부 형태 또는 기업체'자치단체 초청 특강 형식으로 대중을 만난다. 고향인 대구에서는 북구문화예술회관이 클래식 저변 확대를 위해 기획한 '한국을 빛낸 클래식 스타 시리즈'의 진행과 해설을 맡고 있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진행으로 관객들의 호응이 좋다.

"박사 과정 때부터 강연을 다녔으니 얼추 20년은 넘었겠네요. 클래식을 많이들 어려워하시는데 알고 보면 쉽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없이 라디오 듣기를 권합니다. 마음에 드는 노래 한 곡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그 악기 또는 그 작곡가의 작품으로 넓혀나가면 됩니다.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은 좋은 취미가 될 겁니다."

홍 교수에게는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한 재미있는 아이디어도 많았다. 2007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인 피호영 성신여대 교수와 함께 서울 지하철 강남역 입구에서 길거리 연주회를 열었다. 유명 연주자가 74억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했지만 누추한 차림으로 변장한 터라 '거리의 악사'에게는 겨우 1만6천900원만 모였다.

"생활 속의 예술을 표방한 이벤트였지요. 물론 그때 번 돈은 아직 쓰지 않고 보관하고 있고요.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클래식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깨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올해 하반기에는 세계적 첼리스트인 양성원 연세대 교수와 함께 인천 부평구의 6개 도서관을 순회하는 첼로 모음곡 연주회를 열 계획입니다."

그는 2005년 선친의 장례식 때에도 문상 온 음악인들에게 청해 연주회를 열었다. 물론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예종이 케이블TV의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9'(엠넷)을 지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학협력단장인 홍 교수가 "무용 대중화에 좋은 기회"라며 동료 교수들을 설득, 개교 이후 처음으로 방송사와 협력사업을 펴게 됐다. 참가자들은 이 학교 교수진 등으로부터 전문적인 멘토링을 받는다.

◆부전자전의 인생유전

홍 교수가 음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한 선친 홍춘선 씨는 옛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음대 학장과 대구오페라단장 등을 지낸 지역 음악계의 저명인사다. 대구에서 전국 최초의 여성오케스트라를 편성하기도 했다. 홍 교수의 여동생 역시 성악가 홍예지 씨다.

"효성여대 총장이셨던 고(故) 전석재 신부님과 부자지간처럼 지냈던 선친은 예술대 음악과를 음대로 키우셨습니다. 교수 생활과 국립오페라단 활동(테너)을 병행해 오전에는 대구에서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서울 무대에 서기도 하셨지요. 음악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피서를 간 동해안에서도 '여기에다 학생 연습실을 지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되뇌시던 모습이 아직 기억납니다."

그에게 선친은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졌다. 따라가기에는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자가 어떻게 뜻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답안과도 같은 분이었다는 게 홍 교수의 회고다. 그가 한때 음악을 포기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명절이면 학교 인부들에게 일일이 떡과 선물을 전했고, 막걸리도 곧잘 나누시곤 하셨지요. 그 덕분에 몇 년 전에는 저를 알아본 대구 택시기사 분이 '홍 학장 아들한테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인 일도 있었고요. 평론을 하면서도 선친의 그림자는 항상 제 주위를 맴도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 제 글과 참 비슷하거든요. 제가 강연을 자주 다니는 것도 항상 일을 만드셨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겨우 1년의 안식년에 들어가면서도 후배 교수를 위해 방을 비워주기로 했다는 그의 연구실에는 그런 밥상머리 교육의 '증거'가 눈에 띄었다. 해마다 스승의 날에 학생들로부터 받은 '대자보'다. "졸업하기 전에는 절대 스승의 날에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선물 들고 오면 학점 안 준다고 겁주지요. 대신 연구실 밖에 큰 종이를 붙여두고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합니다. 그게 벌써 우리 학과의 전통이 됐습니다."

그가 선친의 예술 혼을 물려받았듯 그의 자녀들도 예술가의 길을 가고 있다. 큰딸은 성악을, 둘째딸은 미술을 전공했다. 막내인 아들은 아직 중학생이지만 사진에 취미가 있다. "애들 이름이 조금 특이해요. '새미' '보미' '범'인데 모두 선친이 지으셨어요. '샘'과 '봄'은 용비어천가에서 이름을 따왔고, '범'은 단군신화에서 따왔다고 하시더군요. 만약 넷째가 있었다면 아마 '곰'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하! 선친이 제게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아이들에게 먼저 '뭘 해봐라'고 시키지는 않습니다. 둘째가 고교 1년 때 자퇴했을 때도 딸의 의견을 존중해줬습니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 30가지를 제가 꼽았더니 딸은 학교를 가지 않아야 할 이유 100가지를 대더군요."

◆아직도 꿈을 꾸는 '청년'

이 교수는 외국에 나가면 세 마디 유머를 곧잘 쓴다고 귀띔했다. 무용원이 있는 대학의 교수이지만 몸매는 무용과 거리 멀다고 하면 폭소가 터지고, 영어 스피치는 잘 못하지만 번역가라고 소개하면 흥미를 보이고,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하면 박수를 보낸다고 한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 그가 꾸는 꿈이 자못 궁금해졌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야구를 정말 좋아했어요. 중학교 무렵에는 체격도 좋아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운이 안 닿아서 선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야구팀 감독입니다. 또 다른 꿈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인데 10년 보장만 되면 지금이라도 가고 싶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들은 초등학교 때 다 배운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자주성과 창조성을 키워주고 싶습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기회'와 '자유'라고도 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 거장의 반열에 오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전통 탱고에 안주하지 않고 누에보 탱고를 개척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예를 들었다. "기존의 것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점이 그들의 공통점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죠. 예술을 전공하는 저희 학생들에게도 늘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 '지식보다는 지혜, 생활보다는 인생을 염두에 둔 삶을 살아라'라고 강조합니다."

홍 교수가 존경하는 인물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예술경영 CEO로 알려진 벤슨 푸아(Benson Puah)를 꼽은 것도 이해가 갔다. 호텔 CEO였다가 싱가포르의 문화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복합문화공간인 '에스플러네이드'(Esplanade)의 총감독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벤슨 푸아는 예술인이 아닙니다. 연봉도 호텔 시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텔 방문객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다는 이유로 과감히 예술 서비스 분야에 도전해서 성공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는 나만의 가치가 있어야 하며,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홍승찬 교수는

홍 교수는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봉덕초교'대륜중'달성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 음악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서양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중들이 클래식에 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삼성경제연구소(SERI) CEO 인문학 '뮤직 인사이트' 등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펴고 있다. 저서로는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 '생각의 정거장' '예술경영 입문' '예술경영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홍 교수는 "예술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답고 좋아서 혼자만 알고 즐기기는 아깝다고 생각해 책들을 썼다"며 "안식년 중에 클래식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책을 몇 권 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립발레단 운영위원,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공연감독, 문화콘텐츠진흥원 평가위원, 대통령실 문화정책 자문위원, KBS 교향악단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의정부 국제음악극축제 예술감독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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