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우산을 잃어버리다

# 우산을 잃어버리다 -박순호(1973~)

현관에 이르러서야 우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지하철노선을 펼쳐놓고 환승역에서부터 이동경로를 되짚어 보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본다

지하철―서점―면접 본 회사―빌딩 화장실―공원 커피자판기

아, 거기, 커피자판기!

비가 개어 접힌 우산을 세워 놓고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었지

도시의 땟물이 씻겨 내려가는 잔디를 보고 있었지

이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면 뿌리가 깊어질까

낡은 수첩에 받아쓰고 그냥 빈 몸으로 온 게 분명해

벤치에 기대어 무능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갈색우산

하늘을 향해 둥글게 펼쳐지는지 확인하고는 누군가가 가져갔을 거야

작년 장마 때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갈색우산

-시집 『무전을 받다』(종려나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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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우산을 쓰는 생명체가 사람 말고 또 있을까. 비를 피하며 살아가는 시인이 비가 오면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몸을 씻고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잔디를 바라보고 있다. 잔디는 맨몸으로 살고 사람은 몸 밖에 무언가를 걸치고 사는 차이가 우산을 만들었다. 몸이 젖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옷이 젖는 게 문제다. 몸은 방수가 된다. 우산 한 번 안 잃어본 사람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갑처럼 기를 쓰고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우산 한 번 안 건네 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무엇처럼 아득바득 되돌려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산은 주인이 없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우산도 내 것이 아니다. "둥글게 펼쳐지는" 한 언젠가 남의 손에서 펼쳐질 테니까. 이 시는 잃어버린 우산이 아까워서 쓴 시가 아니다. 그렇다면 시가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필 그 우산이 어머니가 쥐여준 것이어서 그 마음이 아쉬운 것이다. 그 마음은 사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사는 게 궂은 날 그런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둥글게 펼쳐보고 있는 것이다. 우산 인심만큼이나 헤프게 서로에게 '마음의 우산'을 전해주고 잃어주며 살아볼 일이다. 아까워하지 않고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

안상학<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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