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 해도 토함산에서 감포 쪽으로 내려가는 도로는커녕 나무꾼들이 내왕하는 토끼길이 있을까 말까 한 그런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가당치도 않은 엄두를 냈을까. 요즘도 석굴암에 오를 때마다 '열두 살의 맹세'를 되새기곤 하지만 아직도 그때 내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해수욕은 대학 1학년 때 처음 해 보았다. 공부다운 공부를 해 본 적 없는 고3 생활이 그렇게 지루하진 않았지만 대학생이 된 해방감은 공부를 열심히 한 놈이나 안 한 놈이나 비슷하긴 마찬가지였다.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갔다. 공부보다는 훨씬 적성에 맞았다. 팔공산의 토일(土日) 1박 2일은 먹고 자고 걷는 도서관이었다.
대학 교재는 별로 산 적이 없지만 영한사전 한 권 사면서 콘사이스 값과 딕셔너리 값까지 우려냈다. 평생 농사일에만 매달리셨던 어머니는 "영문과는 책을 많이 사야 하는가베"라며 금융조합에 가셔서 돈을 꾸어 오셨다. 저승에 계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인수분해'와 '피타고라스 정리'도 아들이 꼭 사봐야 할 중요한 책으로 기억하고 계시리라.
다만 원하옵기는 어머니 주변에는 목사나 전도사 같은 분들만 둘러앉아 밤낮 찬송과 기도만 하실 일이지 촉새 같은 수학 선생이 옆에 붙어 앉아 "아들이 피타고라스를 책이라고 합디까"란 그런 싸가지 없는 고자질을 할까 몹시 두렵다. 만약 그랬다간 대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내가 올라올 날만 기다리고 계실 테니깐.
책 살 돈으로 군용 A텐트와 배낭과 버너를 샀다. 여름방학을 맞아 다니던 교회의 고등부 친구 여섯 명을 규합하여 팔공산을 거쳐 포항 해수욕장으로 가기로 했다. 피차 빈한한 가정의 자녀들이어서 밥은 자체 해결키로 했다. 짐을 줄인다며 쌀 속에 봉지를 깐 건빵을 섞었더니 우중 산행 기간 중에 건빵이 새곰하게 변해 버렸다.
팔공산 정상에서 지름길로 내려오다 폭우를 만나 할 수 없이 좁은 텐트에 여섯 명이 쪼그리고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밥을 할 수가 없어 건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맛이 약간 가긴 했지만 그것도 서로 먹으려고 쟁탈전을 벌였고 아무도 배탈이 난 친구는 없었다.
해수욕을 떠나기 전 경비 마련을 위해 어머니 몰래 쌀독에 쌀을 퍼내 시장에 내다 팔고 줄행랑을 쳤다. 이 쌀은 여름 내내 보리밥을 할 때 한 뚜껑 정도 섞는 양식 중의 양식인데 그걸 몽땅 털어 바다로 도망쳤으니 어머니 말씀대로 '니가 쥑일 놈'이다.
몽골 다녀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오키나와에 갈 짐을 꾸렸다. 아들과 딸이 '아이들 여름휴가를 외국의 낯선 바닷가에서 보내고 싶다'며 같이 가잔다. 한 번 거절하면 '다음번엔 초청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떠도는 말이 참말같이 여겨져 "그래, 가자" 하고 따라나섰다. 행선지만 알았지 세세한 일정은 묻지 않았다.
도착 이튿날,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더니 도구치 항에서 유람선처럼 생긴 배를 타고 민나 해변에 내렸다. 선착장과 해수욕장이 눈썹 거리처럼 가까웠고 짐을 들고 이동하는 것도 힘겹지 않았다. 10명의 가족이 비치파라솔 4개, 자리 2개를 50% 할인하여 3천엔(우리 돈 3만6천원)을 주었고 튜브 2개를 서비스로 받았다. 우리나라 해변의 바가지요금에 비하면 엄청 싸고 친절했다. 그뿐 아니라 갖고 간 컵라면의 뜨거운 물도 공짜로 끓여 주었다.
민나 해변의 쨍쨍 햇살은 햇빛화살이었다. 맨살로 단 몇 분만 서 있어도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차갑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온도가 욕객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바다 색깔은 하늘을 닮아 투명한 옥색이었다. 바다 속엔 크고 작은 열대어들이 겁도 없이 돌아다녔고 어쩌다 한두 점씩 떠있는 구름은 수묵으로 번져가는 수채화였다.
이날 점심은 오키나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시모토 식당에서 정확하게 38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오키나와 소바 한 그릇(650엔)을 사먹었다. 오키나와 소바는 메밀이 아니라 밀가루 우동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1시간씩 기다려 우동 한 그릇을 먹을까. 난 다시는 안 먹을 작정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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