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의 창문 밖엔 바나나 두 그루가 큰 키를 자랑하고 서 있다. 키만 큰 게 아니라 잎도 엄청나게 크고 줄기도 무지하게 굵다. 매일 아침 6시쯤 바나나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빗소리는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소리처럼 수다스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우아하면서 맑다.
나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라이브 가수 이라희가 부른 '파초의 꿈'이란 노래 한 소절이 흥얼거려졌다. 바나나의 넓은 잎사귀가 내 의식 속에서 파초의 큰 잎으로 둔갑한 모양이다.
"모르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행여나 돌아서서/ 우리 미워하지 말아야 해/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날까지/ 순하고 아름답게 오늘을 살아야 해/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을 아오/ 가슴으로 노래하는 파초의 뜻을 아오"
내가 만일 빗소리를 오선지에 악보로 옮길 수 있는 음악적 재능이 있다면 쇼팽의 전주곡 15번에 버금가는 피아노곡을 썼을 텐데 듣는 것만으로 끝을 내려니 서운하고 아쉽다. 쇼팽은 지병인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마요르카 섬에 있는 발데모사 수도원에 방 한 칸을 얻어 들어간다. 연인인 조르드 상드와 동행이다.
상드가 시내 약방에 약을 구하러 나간 사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쇼팽은 연인을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수도원의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나기는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쇼팽은 하늘이 양철지붕을 통해 불러주는 빗소리를 그대로 피아노로 받아 적는다. 그 곡이 바로 '빗방울'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전주곡 15번이다.
'빗방울'이란 곡에는 연인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랑과 연모, 꺼져가는 목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가난한 생활에 대한 초조감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래서 에이 프랫(A-flet)이란 빗방울처럼 들리는 낮은음이 주제를 끌고 가다가 2부로 넘어가면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격렬한 음으로 변주된다. 수도원 지붕을 두드리는 장엄하면서도 처절한 음 속에는 쇼팽이 상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이곳 필리핀 바기오는 우기인데다 몬순까지 겹쳐 매일 비가 찔끔거린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조차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었는데 이상하다"며 "내일이면 햇빛이 날거야"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꼬박 여덟 밤을 잤는데도 태양과 눈을 맞춘 적은 하루도 없었다.
비 오는 산중 생활이 하루 이틀 몸에 익기 시작하자 해가 뜨면 오히려 불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일한 한국 TV뉴스인 YTN을 틀면 대구 기온은 연일 37도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선 아침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일은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장작을 때지 않으면 춥고 몰려드는 습기를 물리칠 수 없다. 이 한여름에 벽난로와 친구를 해야 하니 문헌 속에서만 보던 하로동선(夏爐冬扇'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의 풍류를 직접 경험하고 있으니 이게 천당인가 지옥인가.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하늘이나 타인을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 이 빗속에서 재미있게 즐길 놀이를 찾아야 한다. CD플레이어와 다양한 CD가 있으면 비를 주제로 한 음악 감상회를 열면 좋겠는데 내가 원하는 음악을 남의 집에서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과일 사러 시장에 가자"고 선동한다. 이곳 전통시장에 가면 경기도 안산에서 14년간 장터에서 일한 게리라는 친구가 과일상점을 열고 있다. 그는 한국말이 유창한 편인데 말끝마다 '씨발노마'란 욕을 갖다 붙인다. "왜 욕을 하느냐"고 물으면 안산시장의 주인이 그러는 걸 따라 배웠다고 했다. "바나나 맛있는 걸로 두 송이 줘"라고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알았다, 씨발노마"란 후렴을 갖다 붙인다.
우린 푸줏간을 찾아가 살점이 붙어 있는 돼지 혓바닥 두 개를 공짜다 싶을 정도의 가격으로 사서 다시 비 오는 오르막을 헉헉거리며 달려 올라왔다. 바비큐 통에 숯불을 피우고 혓바닥을 규격에 맞게 잘라 대나무 꼬치에 끼워 석쇠 위에 올렸다. 소고기 곰탕에 간간이 섞여 있는 소 혓바닥(牛舌)도 맛있지만 쫄깃쫄깃한 돈설(豚舌)도 얕잡아 볼 물건이 아니다.
돼지 혓바닥 구이를 안주로 필리핀 소주 지네브라에 산 미구엘 맥주를 섞어 기분 좋게 마셨다. 술은 목구멍에서 노래를 튀어나오게 하는 묘약이다. 우린 '가을비 우산 속'에서 '빗속의 여인'까지 비에 젖은 노래란 노래를 다 불렀다. 바깥은 어둠 살이 끼고 있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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