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18)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서

이승만 3대 대통령 취임 반대…정권 강압에 유도회·성균관大서 떠나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내내 심산은 소수파였다. 이승만의 독재에 대한 비판과 투쟁이 만년의 심산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발췌개헌에 이어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심산에게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전횡에 심산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3선을 막아 줄 것으로 기대됐던 신익희의 급작스런 사망은 심산에게도 절망이었다. 심산은 신익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에서 "만인들은 그대 때문에 울고 있는데 오직 한 사람만은 환호하고 있다"며 절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신익희의 장례 당일 수유리 묘소까지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심산이 죽은 신익희에게 말했다. "자네 장례는 경찰이 이렇게 감싸주니 국장이네, 그려." 독재 정권을 향한 가시 돋친 농이었다.

◆3선 취임에 반대

신익희의 급사는 심산의 마음속에 이승만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키웠다. 심산은 이승만이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대통령 삼선 취임에 일언을 진함'이란 글을 발표했다. 3선 대통령을 반대하는 공개장이었다. 심산은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의 대도를 가려면 자유당을 해산하는 동시에 부정선거를 무효로 하라고 촉구했다. 대한민국의 권력을 송두리째 쥔 3선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누구도 할 수 없는 충고이자 요구였다. 물론 이승만과 자유당은 심산의 요구를 묵살했다.

반 이승만 전선의 선봉에 선 심산에게 이승만도 관대하지 않았다. 회유가 없지 않았지만 들을 심산도 아니었다. 정권에 협조하면 '비원을 성대에 주겠다' 는 제안을 거절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정권의 회유에 굴하지 않은 심산의 이승만 비판은 갈수록 거셌다. 정권은 심산이 맡고 있던 유도회와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교에서 심산을 밀어내려 했다. 유도회와 성균관에는 폭력배들도 동원됐다. 애당초 심산이 불편해하던 친일파들도 가세했다.

정권의 압박을 버티기에는 벅찼다. 심산이 총장직을 맡고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교육당국은 심산의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성균관대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도회와 성균관도 심산을 가만두지 않았다. 유도회총본부는 어느새 정권의 하수인으로 변질됐다.

◆낙향

'국민 앞에 읍고함' 이란 성명서를 통해 심산은 '유도회 및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십여 년에 걸쳐 경영해 오던바 대학에서는 이미 친일파 발호로 정치적 추방을 당하였고 여파가 성균관 유도회에까지 미쳐 나의 미력으로는 도저히 구제할 기대가 없으므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 밝혔다. 심산이 성균관대학을 떠나고 난 뒤 일부에서는 정권과 타협하지 않은 탓에 대학발전이 더디었다는 불만이 나왔다. 그러나 심산의 많은 제자들은 정권의 압박에 굴하지 않은 심산의 기개를 지금껏 높이 산다.

심산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효창공원 선열묘역을 놓고 심산은 다시 정권과 부딪쳤다. 효창공원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세 의사와 백범,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등 독립유공자 7분의 유해가 묻힌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백범과 정치적 숙적이었던 이승만은 아시아 축구경기 유치에 따른 운동장 건립을 명분으로 효창공원을 교외로 이전하려 했다. 심산은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를 결성해 반대 투쟁에 나섰다.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나와 1인 시위를 벌였다. 국회에서도 이전 반대를 결의했다.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라'는 심산의 결사반대 덕분에 효창공원은 규모는 축소됐지만 현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했던 시절 심산이 남긴 '통일은 어느 때에' 란 제목의 시는 당시 심산의 처지와 심경을 잘 보여 준다. 병든 몸으로 낙향한 그의 거처를 일가친지들은 청천서원에 마련했다. 고향의 옛집은 기울어지고 무너져 있었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 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지금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세워진 심산의 동상에 새겨진 시다.

◆국가 원로의 역할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힘에 굴복했다. 4'19 이후 심산은 반독재투쟁의 민족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다. 국가 원로로서의 권위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80세를 넘긴 노구였다. 현실의 활동에는 무리가 따랐다. 부정선거의 무효화에 이어 국회에서 간선으로 새로 치러진 4대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로 지명된 심산은 윤보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그가 얻은 29표는 정당 활동을 마다하고 칩거한 심산에게 대한민국 국회가 보인 존경의 표시였다.

이후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등 애국선열의 기념사업회 회장 자리는 언제나 심산에게 맡겨졌다. 독립유공자 기념사업이나 민주운동 단체의 고문역도 그의 몫이었다. 꺾이지 않은 기개로 나라 일에 사심이 없었던 그에게 사람들은 국가 원로의 역할을 맡겼다.

말년의 심산은 가난했다. 부귀영화는 애당초 바라지 않았지만 다시 찾은 서울에 집 한 칸이 없었다. 친지의 집이나 병원, 여관을 전전했다. 심산이 성균관대학교 총장 시절의 일화다. 오랜 친구가 조기 한 마리를 들고 심산을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의 아들이 성대에 시험을 보게 됐다는 말이 나왔다. 심산은 친구가 가져온 조기를 손자를 시켜 돌려보냈다. 심산은 담배 한 갑이라도 청탁에 따른 뇌물이라고 여겨지면 받지 않았다. 어린 손자는 이런 선물을 되돌려 주느라 난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초기 서울 시절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리던 며느리에게 심산은 늘 가난을 복으로 여기며 살라고 했다. 불의의 것을 먹지 말고 배고프면 치마끈을 졸라매라고도 했다.

심산의 이름이 덜 알려진 데에는 그의 청렴과 강직이 한몫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심산은 사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무리를 이끌지 않았다. 그에게는 돈이나 자리 무엇이든 휘하들에게 나눠줄 게 없었다. 얻을 게 없으니 따르는 이도 많지 않았다. 존경을 하는 것과 따르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권력 다툼에서 한 걸음 물러선 심산은 사회적 관심권에서도 한 걸음 물러 서 있은 셈이다.

군사혁명 이듬해 심산은 생존인물로는 유일하게 국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군사혁명을 이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병실을 찾아오자 심산이 돌아누웠다는 일화도 있다. 독립운동에 두 아들을 포함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심산으로서는 일본군 장교출신 권력자를 곱게 볼 수는 없었을 터다. 뒷날 박정희는 심산이 운명하자 조사를 통해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나라를 참다운 신생 민주국가로 굳건히 건설함으로써 생전의 공에 보답할까 한다"고 심산을 추모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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