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행자들/윤고은 지음/민음사 펴냄
재난지 체험이나 관광을 여행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여행사 '정글'의 직원 요나는 회사에서 퇴출될 위기, 즉 개인적 재난에 처해 있다. 상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회식 장소로 어디가 좋을지' 팀원들의 의향을 확인하는 일이나, 계약 취소와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을 달래는 일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다.
급기야 요나는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나 상관인 '김'은 "휴가다 생각하고 출장이나 다녀오지? 사표는 그 이후에 생각하고…"라고 제안한다. 요나는 회사의 재난 프로그램 중 여행객을 채우지 못해 퇴출 위기에 몰린 베트남의 외딴 섬 '무이'로 떠난다.
'무이'섬은 화산이 폭발했고, 사막에 '싱크홀' 현상(땅이 꺼져 사람이나 건물, 자연물을 삼키는 현상)과 부족 간 살육이 자행됐던, 그러니까 '재난'이 닥쳤던 섬이다. 그래서 한때 관광객이 넘쳤으나 이제 싱크홀이 발생했던 장소는 물이 고여 호수로 변했고, 부족 간 살육도 옛일이 됐으며, 화산은 기미도 없다. 이런 까닭에 관광객은 끊어지고, 무이섬을 관광 리조트로 개발했던 회사 '폴'과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또 다른 '재난'에 직면해 있다. 요나는 이 밋밋한 섬이 더 이상 '재난 상품'으로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자본재해에 처한 회사 '폴'은 무이섬을 다시 재난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인공재난'을 기획한다. 다시 거대한 싱크홀을 일으키고, 거기에 수백 명의 사람을 빠져 죽게 할 생각인 것이다.
'폴'은 오래전부터 가림막을 쳐놓고 포클레인을 동원해 모래를 파내고 있다. 그 위를 위장한 다음 정해진 날짜에 폭삭 내려앉게 할 작정인 것이다. 모래만 내려앉아서는 재난이 되지 않는다. '폴'은 수많은 주검을 확보하기 위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사들이고, 이를 냉동실에 보관한다. 재난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던 날 시체를 현장으로 이동한 후 싱크홀을 일으킬 작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많이 죽으면 많이 죽을수록 재난상품의 가치는 올라간다. '폴'은 무시로 교통사고를 위장해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냉동실에 보관한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을 재난의 출연자로 등장시켜 읊조릴 대사까지 마련했다.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려서 나가보니 모든 게 무너져 버렸어요. 발아래가 뻥 뚫려 있었어요. 언니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순식간이었어요.'
의심하는 세계인의 시선을 고려해 재난이 일어나는 시기를 조정하고, 재난이 발생할 정황까지 만들었다.
'바닥과 벽에 갑자기 금이 가더라고요. 문하고 창문도 잘 안 닫히고, 뭔가 귀퉁이가 잘 안 맞는 느낌이 난 지는 꽤 됐어요.'
재난상품 회사 직원으로 '퇴출' 위기에 처한 요나는 이 거대한 음모에 동참하고, 자신의 이권을 약속받는다.
'재해 때문에 죽으나, 가만히 앉아 굶어 죽으나 똑같지 않나요.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재해 쪽이 낫지요. 정글과 계약해서 리조트를 세운 이래로 무이는 그 역할대로 일상을 재단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그 역할이 없어진다는 것은 삶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동참을 권유하는 리조트 매니저의 말은 퇴출 위기에 처한 요나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요나가 다니는 재난관광회사 이름이 '정글'인 것은 은유하는 바가 크다. 회사는 정글이고,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밀림이다. 회사는 이윤창출을 목표로 하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구성원은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쓸모가 없어진 요나는, 자신처럼 쓸모가 다 해버린 섬 '무이'를 쓸모 있는 섬, 경쟁력 있는 섬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이 꼬이고, 그녀는 기획자가 아니라 싱크홀 프로젝트의 '부품'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그렇다.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어른은 소멸하거나 '구걸'로 연명할 뿐이다. 물론 어떤 사회나 '지사'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쓸모의 길'을 벗어나 '낭만의 길'을 선택한다. 해서 지사는 영웅으로 죽고, 지사의 '처와 자식'은 지사가 감당했어야 할 '모멸'과 '부도덕'을 감내하며 산다. 지사든 아버지든, 그들 모두는 결국 '부품'으로 쓸모를 다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250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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