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구십춘광(九十春光)'의 옥잠화(상)

일제 철권통치 시절, 15세에 '하르삔 풍경'으로 데뷔

한국가요사 초창기에 등장해서 활동했던 가수들 중에는 권번의 기생 출신들이 제법 여럿이었습니다. 기생은 원래 소리를 잘 해서 목청이 곱고 뛰어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수로는 더욱 금상첨화였습니다. 평양기생 왕수복과 선우일선, 김복희가 그러했고, 한성권번 출신의 박부용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일제말의 가수 옥잠화(玉簪花)에 대한 것도 기생의 뒷이야기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옥잠화는 어떤 자료에도 본명이 밝혀져 있지 않은데 오래된 신문의 한 토막 기사에서 그녀의 본명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본명은 김복남(金福南), 출생은 1926년으로 추정이 됩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 권번 소속으로 활동하던 기생이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서울의 어느 권번이 아닐까 추정이 되지만 불과 15세의 동기(童妓)로 술손님들 앞에서 또랑또랑하게 노래를 부르다가 콜럼비아레코드사에 뽑혀서 가요계로 나왔습니다. 가요계 데뷔는 1941년 9월에 발표한 음반 '하르삔 풍경'입니다. 옥잠화란 예명도 레코드사에서 붙여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로부터 옥잠화는 불과 2년 2개월 동안 16편을 발표하는 콜럼비아 전속으로만 활동했고, 1943년 11월에 발표한 군국가요 '아들의 소식'이 그녀의 마지막 곡입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음반 가사지를 통해 옥잠화의 얼굴 사진 몇 커트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생김새는 뭐랄까, 옥잠화의 꽃말이 그리움, 혹은 아쉬움이라 하는데 그것을 연상하듯이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뿍 머금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데뷔곡 '하르삔 풍경'(김성봉 작사'하영랑 작곡, 콜럼비아 40877)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초밭 네온거리 모스도와야/ 송화강 강 우에는 조각달이 걸렸다

울어라 하르삔아 하르삔아 울어라/ 나는야 울고 싶은 코스모포리탄

꽃 양산 물결친다 기다야스카야/ 챠무스 고동소리 우렁차게 들린다

울어라 하르빈아 하르빈아 울어라/ 내일은 지지하루 마차로 간단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전반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 및 만주국 건설 정황에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의 제국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일본의 북진정책에 대한 은근한 수긍과 찬탄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모스도와야, 기타야스카야 등의 말들은 이국적인 러시아풍 색채가 강했던 북만주의 도시 하얼빈의 거리이름을 나타낸 것입니다.

옥잠화가 가요계에 데뷔한 시기는 그야말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 공포, 보호교도소 설치, 순문예지 '문장' '인문평론' 등의 강제폐간,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조선임시보안법 공포시행 따위의 무시무시한 철권통치가 자행되던 일제 말 삼엄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수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어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고, 오로지 레코드사에서 기획 제작된 가요곡만 발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요곡에도 반드시 조선총독부의 일방적 지시와 강제가 반영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옥잠화가 발표한 음반들은 군국주의 이념의 표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옥잠화 음반에 노랫말을 붙인 작사가들은 이가실, 김성봉, 김영수, 함경진 등입니다.

일제 말 조선총독부는 8'15광복이 되기 불과 5개월 전까지도 대중연예인을 동원해서 각종 군부대 위문공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옥잠화의 경우도 1945년 3월 11일 일본군 육군기념일을 맞이해서 당시 친일적인 단체였던 조선연극문예협회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최로 일본군 육군병원에서 개최한 백의용사위문연예대의 멤버가 되어서 홍청자, 윤부길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는 기사를 신문보도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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